하느님 나라의 전달자,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마지막 시대 그분과 함께
세자르 마르케셀리 신부/ 교황청이탈리아남부 신학대학의 성서학 교수
인생의 가장 심오한 신비는 예측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으며,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죽음의 잔인한 냉혹함이다. 이러한 일상을 통찰한 선조들은 인간의 참사를 이기고 슬픈 인간 운명의 고통을 감소시키려고,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닥칠 일이라도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아름답고 효과적이며 즐거운 이미지인 태양의 하루 여정은 그 목적에 적합하다. 당신의 삶이 어둠 속에서 머뭇거리고, 슬픔과 의심에 파묻힐 때, 태양은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창조물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태양 외의 그 어떤 것도 당신을 도울 수 없고, 어떤 것도 당신을 따뜻하게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당신에게 더 위안이 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매일 저녁 붉은 핏빛으로 변하여 서쪽으로 사라지는 태양 역시 냉혹한 운명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석양보다 더 찬란한 태양은 내일 아침 다시 솟아난다. 밤의 어두운 시간들, 그 무덤 그러나 잠정적 무덤인 그 대부분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어두움에서 찬란함으로 바뀌는 데 도움이 되고, 당신은 눈앞에서 그것을 목격할 수 있다.
선조들은 이러한 느낌으로 그들의 삶을 태양의 여정으로 묘사하려 했다. 각자의 마음속에는 태양의 출발-휴식-죽음과, 깨우고-일어나는-부활의 순간과 그것을 기다리는 감춰진 태양 같은 무엇인가가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과 부활은 이러한 선조들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태양을 보도록 아주 효과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분께서 저녁에는 죽음 속에 계시지만 아침에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게 다시 일어나시는 것이다. 어둠과 빛 사이로 움직이는 태양에서 그들은 스승의 죽음과 부활의 상징을 보았다. 그리고 태양이 하루 내내 우주의 모든 창조물에 닿고, 매일 그 열기로 주어진 생명의 힘이 새로워지고 모든 것에서 그 힘을 느낄 수 있듯이, 부활하신 주 예수님도 모든 인간 창조물 안에서, 세계 모든 곳에서 매일 새롭게 느낄 수 있다.
부활이 항상 일반 독자들의 관심을 끌며, 그것을 더 깊이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용기를 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주된 관심이 선교 세계일 때 그 연구는 즐거워지고, 그 분위기를 깊이 느끼는 아직 신도가 되지 않은 이방인들의 사도가 쓴 신약성서의 서간들에 한정될 수 있다.
윤리-사목적 반향은 강하다. 부활과 구원, 구속과 성령은, 오늘날 성령에 따라 사는 삶에서 두개의 볼 수 있는 윤리적 기둥들이다. 그 해석은 미래의 삶, 곧 죽음 후 부활하신 주님과의 즉각적 재림- 만남에 대해 열려있다. 모든 것이 결정적 역할과 실제적 해석의 표준이 되는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과 해석학의 상호 관련은 그 윤곽을 드러낸다. 이것은 1코린 9,1; 15,8; 갈라 1,15-16 그리고 2코린 4,6의 역사-심리학적 해석에 점차 집중적으로 드러났으며,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바오로의 체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 4개의 관련된(사도 9,1-19; 22,6-21; 26,12-18) 바오로의 개인적 증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한 그의 선교 열정의 요지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신약성서 서간에 나오는 몇몇 초기 그리스도인을 검토할 것이다. 교회는 선교사가 되기를 재촉 당한다는 고린토 첫째 서간에 초점을 맞추면서, 우리의 관심을 이교도들의 선교사, 바오로 사도의 사고에 한정시킬 것이다.
* * *
1. 여기서는 1코린 15장의 명백한 언급이 필요하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오래된 바오로의 증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몇 가지 전조적 표징들이 있고, 사도의 성찰의 반향 안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에 따른 첫 번째 신중한 접근법은 천천히 움직이고, 씨를 뿌리고 또 뿌리는 그의 복음 선포를 위한 중요한 시도들이다.
1.l.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1테살 1,10)
51년 가을, 유다-그리스도교 공동체인 테살로니카 공동체는 죽은 이가 다시 일어날까? 그러면 어떻게? 라는 “사실”과 “방법”에 관한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몇 년 뒤 이 질문은 1코린 15장 35절에서 명백한 양식을 찾아냈다. 그러나 테살로니카 첫째 서간 4장 13-18절에서 이미 사도는 그의 평소의 사목적 감각으로 그들 관심을 끌며,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깊은 감동을 주었지만, 지역 회당에서(사도 17,1-10) 죽음과 부활(사도 17,3),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교는 실패하였다. 반대와 대조법은 환영받았으나 문제는 어떻게 씨앗에 물을 뿌리는가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을 …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1테살 1,10) 부활과 부활하신 주님의 재림(parousia), 이것이 일어났을 때 그분께서는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10절) 것이다. 이렇듯 커다란 위로의 메시지는 그들에게 그분의 말씀(logos)이 완전히 알려지게 예정되었고, 그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6절ㄴ)으로(pathos)각주1) 충만해져, 감동적인 알림(ethos), 해방의 대망을 준비한다. 참으로, 성령께서는 이미 위대한 결과를 확보하셨다. 믿음에 대한 그들의 확신은 확산된 성령의 은혜(Bonum diffusivum sui)가 되었고, 울리는 선교 선포가 되었다. 그들은 어디에서든 연대 활동으로 분출되는, 신앙으로 인도되는 힘들이다. 섬세하고 자비로운 포로(captatio benevolentiae)인 바오로는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그의 복음의 중심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심을 알려야 하며 이미 준비를 갖췄음을 느꼈다. 그는 이것을 1코린 15장 11절에서 반복한다. 그들은 (재림의) 예수님을 기다려야 한다. 그 동안, 그들은 “살아 계신 참 하느님께 봉사”해야 하며, 이 봉사는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1.2.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1테살 4,16)
1테살 4장 13-17.18절을 보자. 바오로는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라는 수사학적(litote) 형태에 “우리는 여러분이 모르고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13절)각주2)라는 권위 있고 열정적이며 더 조직적인 표현으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테살로니카 인들에게 상기시키고 활기찬 토론을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4,14) 그는, , 그가 성찰한 것이 참으로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신 나자렛 예수님을 따르는 테살로니카의 그리스도인 생활에 받아들여 진 것에 주목 한다. 이 사실은 테살로니카에서 논쟁이 된 주제가 아니다. 사실 숨겨진 뜻을 읽으면서 우리는 “여러분이 믿고 있는 것을 내가 아는 사실대로 우리는 믿습니다.”라는 암시적으로 표현된 바오로의 생각을 개별화할 수 있다. 사도는 이 사실-사건을 단호하게 믿는 자신을 포함해서 어떻게든 알기를 원하는, 의심을 품고 확신이 없는 자신의 청취자들도 신앙으로 그에게 일치시키려는 것이다. 제안하고, 기다리고, 포괄하는 전달법으로.
실제로 현실 문제를 구성하는 부인할 수 없는 암시가 있다. 그 ‘사실’은 그 자체로 분명하고, 승인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것은 또 증명될 것이다.(1코린 15,1-18 참조) 그러나 어떻게? 문제의 이러한 양상을 의식하며, 사도는 13절에서 이미 했던 것처럼, 15절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라는 새로운 권위적 표현을 삽입한다. 13절과 15절의 두 가지 표현은 서로 연관되며, 각기 다른 것을 설명한다. “우리는 여러분이 모르고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여러분이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더 이상 모르지 않게 될 것이다. 실로 그는 부활의 방법이라는 테살로니카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해서 그 이상으로 설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바오로는 자신의 메시지를 받은 이들이 지닌 문제를 식별해 내는 목자이다.
대답은 두 번째 단계에서 나온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각주3)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라는 14절ㄴ에 기초하고 그분의 부활에 대한 사실에 동화된다. 그러나 어떻게 죽음을 이기는 유례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14절의 문제를 깨달으면서, 사도는 15-17절에서 부분적인 답변을 한다. 그것은 문학 장르인 묵시록을 통해 장면을 장엄하게 만들고, 설명할 수 없는 것에 시각적 윤곽을 그리는 것을 도와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느님의 대천사 나팔 소리에, 그분의 명령으로 살아날 것이다(16절). 그들은, 그리고 재림의 순간에 아직 살아있는 모든 이들, 살아남은 자들, 왼쪽에 있는 이들은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을 맞이하며 늘 함께 있을 것이다.(17절) 생생한 이 장면은 묵시록의 어조이다. 바오로는 부활한 이의 새 삶의 형태를 예견하고, 그것을 구름 속에 그린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구름(성서적-랍비의 우주론) 저 너머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중재자를 보고, 하느님 세상에 적합한 윤곽을 보았다. 그 윤곽은 완전한 죽음의 변화 과정을 그들이 새로운 창조적 특성으로 깨닫는 동안, 폭력을 동반하는 표현인 “들어 올리다”(taken up)라는 논쟁 속에 있다. (질료적 해석으로) 원래대로 새로워졌기 때문에 새로운 것인가, 또는 그것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인가? 후반은 1코린 15,35-58에서 좀 더 설명할 것이다. 1테살 4,13-18은 풍부한 증거이다.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흠 없이(1테살, 5,23-24 참조)
선교사 바오로는 그가 1테살 4장 13-17절에서 설명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1테살 5,23-24에서 빠른 회상 장면으로 주제에 다시 접근하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to pneuma) 혼과(hê psychê) 몸을(to sôma)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이 구절은 일련의 사목적 그리고 성령 강림 양식(15-22절), 윤리적 권고 8개로 가득 찬 진심어린 권고 명령법으로 준비되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 이러한 진심어린 외침은 지침서와 같다. 그것은 인간의 습관과 종교, 개별적이고 교회적인 순간에 몰두하며, 주님의 재림은 흠 없는(23절), 각자의 온전함에서 개인적 인격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알린다. 그러나 무엇이 살아계신 하느님 품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을 찾으러 다시 오시게 이끌 것인가?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고, 확신할 수 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리고 끊임없이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5,24) 그분은 그분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보증했다.
사도에게 매우 중요한 ‘기도하라’는 여기서 집회의 주제를 이해하고, 체험하며, 심오하게 함을 보장한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7절) 그 안에서 사도는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라며 자기 자신을 포함시킨다. 그분께서 오실 때 여러분을 흠 없이 지키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1.4.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일으키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1코린 6,14)
테살로니카에서 극적으로 시작되었던 이 주제는 몇 년 뒤 고린토에 영향을 주었다. (53-54절) 바오로는 1코린 6,12-20에 그것을 썼고, 네 가지 슬로건(logos-eihos)에 따라 특징지어진 세 가지 단계로 토론한다. 소통 방법에 대한 또 다른 언급으로서, 읽는 이들은 기억하고(logos-ethos), 내재화하며, 지지해야(pathos) 한다.
“ ‘나에게 모든 것이 허용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하지는 않습니다.”(첫 번째 슬로건, 12절) 음식도 허용되고(두 번째 슬로건, 13ㄱ절), 애정도 허용되지만(세 번째 슬로건, 13ㄴ절), 두 가지는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할 때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 ‘나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나를 좌우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네 번째 슬로건, 12ㄴ절), 먹고 살기 위한 음식이나, 난잡한 애정도 아니다. 각자 분별하여 좋은 것을 간직해야(1테살 5,21)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일으키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1코린 6,14)와 같이 이것을 하느님께서 주실 때, 부활의 단어, “일으키실”(êgeirein) 결정적 역할에 모든 것이 관련되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활한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과장과 혼란을 피하고,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선택과 하느님과의 더 적합한 관계, 인간 성숙의 표징으로서 자기 모습의 균형 또는 재 균형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일치가 여러분 삶의 목표가 되도록 사도는 자신의 권고를 확장해나간다. 이것을 방해하는 어떠한 것도 “피해야” 한다. 그 대신 긍정적인 것이 세워져야 한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르는 체하는가?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분께 속한다(여러분은 그분의 것이다)는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여러분의 몸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실과 방법을 지금 유기적 주제로서 소개하려고 결심한 바오로의 생각(6,20)처럼 여러분은 오늘 부활을 향해 걷고 있는(6,14ㄴ) 것으로 보인다.
2. 우리는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전해 받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1코린 15,1-11.12-34) 그리고 부활한 몸의 특성(15,35-58)이라는 주제의 가장 세부적인 부분에서 사도의 성찰은 논증이 되었다.
2.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 작은 신경(1코린 15,1-1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1ㄱ)라는 구절은 장엄하고 엄숙한 시작이다. 비난의 형태에, 같은 신앙의 형제들인 코린토 공동체를 위한 호의적 관계로 유연해진 사도의 권위적 논증들 가운데 하나가 삽입되었다. 긴장된 동사의 출현은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진입 형태로 이어진다. 하나는 당신의 구원 계획, 신비(mysterion)(1코린 1,27; 에페 1,9; 3,5.10; 6,19)를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활동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했다.(eueggelisamen)”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은 그것을 받아들였다.(episteusate)”이다.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라는 표현은 글을 쓴(ethos) 사람의 권위를 보여준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알려주었다. 왜 여러분은 그것을 막으려 하는가? 선교사의 모습이 전달된 곳에서 도전적 시작은 결정적 역할을 지니고 있다. 사도는 본문의 편집을 세부적으로 정리하여 이것을 보여준다.
가. “내가…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나.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설교한) 것을
다. 여러분은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라. 그리고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가’. 그리고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 이 복음 말씀을 지킨다면,
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설교한)
라’. (그리고 여러분이 받아들인 것을)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비난하려는 ‘대화적’ (부재중인 필자가 청중과 함께 취하는 간결한 대화) 방법을 택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잘 알려진 요소들을(어떻게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 윤곽을 취하는(생성 과정에 있는: in fieri) 신앙 고백의 부분으로 끌어들인다.
“여러분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라는 구절처럼 변화 반복법(문학적 병렬)과 어의론(요지의 병렬)의 배열은 그것을 분명히 기억하게 하고 관계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데 적절하게 사용된다. 여러분이 헛되게 믿는 것이라면, 참으로 슬플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사도와 그의 청중 사이에 토론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의 선포를 받아들인 이들은 그들이 믿는 순간부터 구원되었고, 그들은 자유로우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자유와 악마의 힘에서 그들의 형제자매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작은 ‘신경’. 구원하는 복음은 사도가 새로운 변화 반복법과 어의론의 배열을 기용한 요점을 지니고 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전해 준”(3절)이라는 전수, 전달되는 전통과 함께 끊임없는 알림으로 바오로는 자신에게 무엇보다 먼저 규범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 요점은 3-5절에 묘사된 초대 교회의 복음 선포(kerygma)이다.
“그리스도께서는
a.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b. 성경 말씀대로
c. 묻히셨으며.
그분께서는
a’.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b’. 성경 말씀대로
c’.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알려졌고, 그분이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나타나셨으므로 그분께서 살아계시다. 어의론의 병렬은 성경 주변을(b-b’) 선회하며, 각 절은 “묻힌-감춰진 몸”과 “나타나심-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c-c’)에 관련된 “죽음과 부활”(a-a’)에서 그 자체의 진행을 보여준다. 그것을 쉽게 기억하게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이 작은 신경의 정리는 거의 불가능한 결말을 위하여 죽음의 패배를 기록한 사실-사건을 설득하는 데에 핵심적으로 주장하려는, 나타내려는(epideictic) 목적을 지니고 있다. 소통의 도구들로서 키워드가 선택되고 개인적 체험이 많이 확인되었다.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구자인 선교사 자신의 신앙이 견고해 보여야 하고 열정적이어야 한다.
2.2. 선택된 분명한 부활 언어
바오로 선교사는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이를 위해 적합한 도구들을 선택해야 했다. “일어난-다시 깨어난 존재 (egeirô)”는 예수님의 죽음을 다시 깨우신 하느님의 행동과 그 결과의 지속을 묘사한다. 다시 깨어난 부활하신 분은 “더 이상 죽지 않는다.” 이 사건은 위기와 고통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행위로 예수님의 죽음 후 “사흗날”에 일어났다.각주5)
“네 자신을 보여라, 네 자신이 보이게 하라(oraô)”는 나타남의 동사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작업이며, 그래서 시각적 체험은 객관적이고, 그것은 지켜보는 주체에 달려 있지 않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육신의 형태로 현존하신다.각주6) 그분은 케파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1코린 15,5ㄱ; 루카 24,34) 증인들의 인식은 열두 제자들에게 이어지고(5절ㄴ), 그다음에는 50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6절), 야고보에게(7절), 사도들에게,각주7) 그리고 마침내 그분께서 바오로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그의 체험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잘 알려진 사건으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을 참조할 수 있다.(1코린 9,1)각주8)
역설적 필치로, 사목적이며 영적 경험의 직설법으로 사도는 그 독자들에게 공감된 감성( syn-pathos)을 요구한다.
맨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3절),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8절).
칠삭둥이 같은(8절ㄴ),각주9)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9절ㄱ).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9절ㄴ).
그러나 내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이 나를 복음의 전달자로 만들었습니다(10절).
지금 그는 단지 살아계신 주님을 “받아야”(paralambano) 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오로는 그분을 만났었기 때문에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역사적 핵심들을 열거함으로써 종교적인 확실성을 되살리고 있다. 그가 받아들인 깨달음은 그를 선교사로 - 복음의 전달자(1코린 15,1.10.11.30)로 만드시는 하느님의 주도권이다. 그가 자신이 쇠진될 때까지 일하고, 다른 사도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하느님의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음으로써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의 고소에서 보호되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의 체험 전에 교회를 박해했었던 그가 지금 지칠 줄 모르고 교회를 알리는 것이다. 선포하는 그의 권위는(ethos) 이러한 사실에 놓여 있고 성장하는 것이다. 부활한 미래의 삶(logos),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하면서, 바오로는 그것을 받아들였고(pathos), 받아들인 복음 전승의 인도하는 힘(1절), 화해, 구원, 속죄를 선포하는 자가 되었다. 아무도 박해자-설교자인 바오로를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구출(Sôzô)은 구원을 알리는 단어이다. 이는 믿는 이들이 비천한 몸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필리 3,21)되고, 그 많은 유혹과 악에 맞서도록 그들을 촉구하며, 역사적 상황으로 그들에게 부과된 수많은 한계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시는, 피조물들을 위한 그분의 구원 계획이다. 구원은 그분 안의 생명이다(로마 5,10). 그것은 미래의 현실일 뿐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실제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성장하는 신앙이기에 이것은 복음을 수용하고 승인하는 기초이며, 신앙으로 복음을 신봉하는 이들에게 제공된다.
신앙은 선포를(로마 10,9)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분은 주님(Kyrios-Lord)이시다. 이것이 우리가 선포하는 것이고, 여러분이 믿는 것이며, 두 개의 진행형 동사이다(11절). 로마서 11장 20절에서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희망으로 지속되는 신앙으로 움직이는 이들은, 아드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끌어올리신 하느님께서(히브 13,20) 아드님 안에서 구속하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2.3. 그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사건(1코린 15,12-19)
a.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12절)
b.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3절)
c.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4절)
d.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7절)
e.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9절)
사도의 생각은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아주 의미심장하다.(1코린 15,12)각주10) 다섯 개 가정법의 구절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의 타당성과 그들 논제의 어리석음을 표현한다.(13-19절) 논증은 반복어구로서 연속적인 종결로 다섯 개의 “다면”(if)을 사용하고, 점진적 강세는 명백한 거부를 드러낸다. 이것은 하느님의 성실함(15절)과 우리의 설교에 대한 의심을 물리쳐준다. 비극적 서간의 화려한 필법이지만 신랄한 풍자와 함께,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20절)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진 이 생명을(2코린 5,4ㄴ) 그분께서 가져오신 새 생명으로 덧입기를 바라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죽음의 논리가 압도적인 것은 사실이며, 그것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죄악 때문에 나올 수 밖에 없는 파멸의 상황과 같다.(17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고(3절), 부활하셨다. 그분의 부활은 구속이며 화해이고, 그것은 성실하신 하느님께 불성실의 사면을 검증받고, 또한 죽은 이들이 되살아날(16절) 것도 보장받는 것이다.
죽음의 논리가 억압적이라면, 부활의 논리는 해방적이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명사 ‘부활’(anastasis: 2번)과 동사 ‘일어나다’(egeiro: 9번)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희망의 힘 안에서 바오로는 끊임없이 맹수와 싸우고, 자신의 윤리적 선택을 입증하며 그의 목숨을 걸었다.(1코린 15,30-32)
이처럼 죽음과 부활은 서로 연관성이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죽음의 죽음은 이미 시작된 멈출 수 없는 과정이다.
2.4. 회피하려는 위험
코린토 서간의 논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모험적인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인간 운명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그분의 영광스러운 육신으로 일어나셨고, 같은 방법으로 모든 인간이 일어날 것이다.각주11) 그분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선포의 핵심이며, 그것은 죽을 때까지 완전하게 인간으로 생활하신 예수님에 기초한다.(1코린 16,16)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선포되었다. 이것 없이 신앙은 헛된 것이고(14절), 복음의 선교사들은 하느님의 거짓 증인이 될 것이며(15절), 예수님의 사건은 죽음으로 비참하게 끝나는 실패에 불과할 것이다.
신앙에 부당한 묘사는 더 이상 부활하신 주님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17절).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친교의 삶이 취소된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죽었지만 지금은 부활하여 살아난 이로 살아가는 것이다.(18-19절; 1테살 4,14) 이러한 희망으로 바오로는 위험을 무릅쓰고(1코린 15,30-32) 살아가며, “아담과 그리스도”를 나란히 설명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둘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자(반대의 형)를 넘어 후자의(정형:type) 탁월한 특성을 표현한다.(22절; 로마 5,15절 참조.) 사도의 선교 감각은 항상 깊이를 더해간다.
2.5. 그리스도께서는 살아난 이들의 맏이이십니다.(1코린 15,21-22)
예정된 선포는 어떠한 미래의 논증들도 즉시 생략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20) 생명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일어날 길게 연속된 죽음의 원형이시기 때문에, 엄숙하고 효과적이다.
a.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21절ㄱ),
b. (죽음의)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21절ㄴ)
a’.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22절ㄱ),
b’.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22절ㄴ)
이 완전하고 명쾌한 기록에 주목하라. 옛 인간의 첫째인, 아담(22절b), 새로운 인간의 첫째인, 그리스도(22절b).
아담의 불순명의 결과인 죽음은 모든 인간 존재에게 고통스런 공동의 운명이다.(a-a’) 고대 유다교 전통의 이 적절한 종합은 경탄할 만하다. “여러분은 율법에 불순명한 아담만 주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죽음을 부여하였다.”(22절b?) 참으로 후손각자에게, 죽음의 원인은 뱀이 아니라 자유롭게 배신하는 데 있다.각주12) 죽음은 부활과 병행됨으로써 그 힘을 잃었는데,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과로서 부활이 모든 사람의(b-b’), 모든 후손의 공동 운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사, 생명을 가져오는(zôopoiein: 24절ㄴ)이 말하는 것처럼, 부활은 죽음 후 생명으로 돌아오고, 다시 살기 위한 부활로 종말론적 사건(23-28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담 자신은 성지 예루살렘의 골고타 아래 자리한 아담성당의 외경 전승처럼 다시 태어날 것이며, 그는 구속과 화해로 “장차 오실 분의 예형”(로마 5,14ㄴ)이며, 구원을 맛보는 첫째가 될 것이다.
사도는 부활하는 순서를(23-32절) 소개한다. 부활한 이들의 ‘맏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23절ㄱ; 1테살 4,16-18 참조), 그 다음은 “그분께 속한 이들”(1코린 15,23ㄴ)이다. 그때에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릴 것이다.(24절ㄱ) 먼저 그분께서 모든 원수를 그분의 발아래 굴복시키셔야 하고(25절), 특히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알려진 하느님의 우주적 차원에 가장 변함없이 도전하는 완고한 죽음까지도(26절)그러해야 한다. 각주13)
그러나 죽음의 죽음은 이미 혹독하게 시작되었다. 대세를 행할 때 대세를 받은 이들에게 이것이 실현되는 것이다. 만약 죽은 이들이 전혀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겠는가?(29절 참조) 각주14) 그 다음은 개인적 증거이다(30절). 바오로는 단지 인간적 이유로 (맹수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설교하기 위해 매일 죽음과 직면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참으로 생애의 좋은 시간을 가지는 게 나을 것이고(32절),이사야 22,13에서 과장되게 표현한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 없는 전형적 인간이 나을 것이다.
복구된 감성(sympathos)인가? 말씀(logos)을 확신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도의 권위 (ethos)는 강하다. 모든 인류와 우주 역사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보편적 수위권을 읽는 의심할 수 없는 숭고함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 그 위험에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조심스런 선택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리는 세례를 받고 새로 태어남을 기뻐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 메시지를 적합하게 전할 수 있는지 잘 연구해야 한다. 선교 명령은 하느님을 아는 행복에서 영감을 받는다.
2.6. 알려진 것에서 안 알려진 것까지(1코린 15,35-37)
부활한 육체는 어떤 것일까? 이 질문은 항상 인류 역사를 통해 던져졌고, 항상 열정적이며, 긴장감을 준다. 죽음 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우리는 분명히 부활할 것이지만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 코린토 서간에는 많은 질문과 연구가 거듭된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살아나는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되돌아오는가?”(35절) 우리의 온전한 ‘자신’이 죽음을 넘어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는, 그 완전함으로 전이되는 “살아있는 몸”으로 보이는 개인의 전체를 이루는 데 주의하라. 의사소통의 명작인 이러한 연구 논증에서 사도를 따라가 보자.
1. 씨뿌림의 동력(1코린 15,36ㄴ-38)
자신의 가르침에 효과를 주기위해 바오로는 다섯 개의 유추를 사용한다. 첫째는 식물의 세계에서 택했다. 뿌려진 밀의 씨앗은(36절ㄴ) 생명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먼저 죽지 않고서는 자라나지 못한다.(요한 12,24 참조.) 그래서 그것은 생겨날 몸체가 아니라 아직 씨앗이다.(37절)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체를 주신다.(38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명확하다면, 따라서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이고(1테살 4,14), 그러한 방법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이 부활 인식은 동등하게 명확하지 않다. 바오로 자신은 살과 피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50절) “영적”인 사람만이 완전하게 그것을 차지할 것이다. 동시에 이 사실의 새로움과 풍요함 그리고 이 방법의 간접적인 인식은 필연적인 유추를 이용한다.
사도는 자신의 숙련된 방법으로, 뿌리는 밀 씨앗의 유추를 사용하면서 전개한다. 그는 우리의 부활은 죽음에서 첫 번째 객관적 진실의 순간을 발견한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더 완전하고 충만한 삶으로 살아나는 것이다.(36절) 왜냐하면 죽음 안에는 생명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썩음에서 씨앗은 생명의 황홀한 절정으로 “새로운 생명이 부여”된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이며 그것은 첫 번째 생명의 종류에서 두 번째 완전히 다른 생명의 종류로 이전하는 것이다. 모든 하느님의 피조물은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씨앗이 겪는 근본적 변화의 과정을 지각해야 한다. 바오로가 사용한 씨앗의 이미지는 요한복음의 구절 12절 24절과 개정된 1코린 15잘 36절에 나온 것이다. 그래서 씨앗의 이미지는 단순한 이미지이기보다 복음을 반영하는 비유이다.
그리고 답변의 두 번째 요소는 죽음을 통해서만 다시 살아난다는(36절) 부분이다. 역사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유로우신 결정으로 모든 씨앗에 각자의 몸체를 주신다.(38절)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1장 11절에 주목할 만한 암시를 보게 된다. 고린토 신자들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살아 있는 존재로 “변화하는 씨앗”을 관찰하게 되며,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이러한 가능성의 완전한 보증을 인지하게 된다. 그분께서는 항상 일하시며,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미 하셨던 것을 믿는 이들 안에서 새롭게 하실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도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ㄴ) 씨앗처럼! 생명은 드러났지만 풍요성은 감춰져 있다. 씨앗이 썩는 일반적 전개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의 폭발, 실제적 기적은 나중에 일어난다.
이것이 죽음 속에 잠자고 있는 이들에게 일어날 일이다. 씨앗처럼 노출된 그들은 온전히 하느님의 생명과 효과적으로 주어진-생명에 열려 있다. 새로운 ‘상황’으로 그들 ‘자신’ 전체가 바뀌고, 새로운 생명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하느님과의 대화하던 자는 이제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다.(1요한 3,2ㄴ)
단지 선포적인 알림인가? 분명히, 그러나 선포는 역사에서 나오고, 그것은 역사적 예수님과 연결될 때만이 의미 있고 중요하다. 그러므로 신앙에서뿐만 아니라 구원 역사의 실제에서도 그분이 부활하셨다면,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어떻게 부활하는가? 그분처럼!(1테살 4,14)
2. 육체들의 다양성(1코린 15,39-41)은 두 번째 유추의 내용이다. “육체라고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가 다르고 집짐승의 육체가 다르고, 날짐승의 육체가 다르고 물고기의 육체가 다릅니다.”(39절)
그래서 바오로는 별들의 생존에서 택한 세 번째 유추를 제안한다.
“하늘에 속한 몸체들(sômata)도 있고 땅에 속한 몸체들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체들의 광채가 다르고, 땅에 속한 몸체들의 광체가 다릅니다. 해의 광체가 다르고, 달의 광채가 다르고, 별들의 광채가 다릅니다. 별들은 또 그 광채로 서로 구별됩니다.”(40-41절)
존재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상 이미 다른 많은 몸체들이 있다. 그들은 질료적(psychic) 인성으로부터 영적인(pneumatic) 인성으로, 항상 보이는(이 세상) 것으로부터 항상 감춰진(다음 세상) 것으로, 하느님께서 우리 ‘자신’의 궁극적 변화를 가져오실 무한한 가능성들을 묘사한다. 여기서 바오로는 성령의 작용으로 질료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피조물의 특성이 점진적 변화 과정에서 모든 실체들이 일치될 영광스럽게 변화된 부활하신 주님께로, “영광스러운 몸”(필리 3,21)을 향한 피조물 모두에게서, 전체적으로 일어날 역사의 혹독한 역동성을 묵상한다. 변화를 통한 부활은 이미 자리했다. 이러한 피조물의 다양성은 그 약속이며 예견이다. 하느님께서 피조물을 다양하게 창조하셨다면, 그분께서는 그것을 변화시켜 재창조하실 수도 있다.각주15) 나중에, 날마다 그분께서는 식물, 동물 그리고 별들의 실체에서도 변화하는 과정을 지휘하실 것이다. 사도는 그들의 감춰진, 의미 있는 표징들을 인지하고, “죽은 이들의 맏물”(1코린 15,20)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시고 시작하신 역사와 미래의 신비를 직접 응시한다.
코린토인들은 자연의 질서를 조심스럽게 지켜봐야 하며, 창조주이시며 변화시키는 분이신 하느님 활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작업은 모든 이들의 눈앞에 있다. 바로, “그래서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42절ㄱ)
3. 변화 : 새로운 인격, 성령의 활동(1코린 15,42-44절ㄱ)
우리는 네 번째 유추에 와 있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42-44절)
42절ㄱ에 삽입된 네 개의 대조법으로 사도는 다시 한 번 유추를 사용하여 변화된 몸을 묘사하려 한다. 우리는 모두 썩어가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물질적 몸(psychic)에서 (영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완전히 부활한 몸은 썩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피조물에게 새로운 실체를 부여하는(필리 3,21) 성령의 활동의 결과이다. 모든 피조물의 실체는 죽음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그 실제 모습에 도달한다. 땅위의 치욕의 씨앗이 (물질적 기초), 그 자신에 영광의 씨앗을 지닌(43절ㄱ) 영적 몸으로 살아날 것이다. 그 자체에 나약함의 씨앗을 지닌 지상의 몸은 부활로 변화하여, 그 안에 강한 씨앗을(43절ㄴ)지닐 것이다. 그리고 동물성의 씨앗은 부활로써 영적 씨앗이 될 것인데, 모든 동물적 육신 안에는 영적 몸이 될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는 갈망이 분명히 존재한다. 죽음, 치욕, 부패, 약함, 동물성 그리고 물질성으로 버려진 것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넘어 그 반대 특성으로 변하려 한다.
지금, 수많은 물질적인 몸-인간(38-41절)을 창조하셨던 하느님께서 또한 부활한 영적인 몸-인간들(42-44절)도 창조하실 것인가? 그분께서 역사적 증거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과 변화, 영광, 생명이라는 증거를 우리에게 주셨다. 증거는 변호가 아니라 유추이다.
4. 첫 인간 아담과 마지막 아담(1코린 15,45-49.53)
다섯 번째 유추: 논증은 그 절정을 향해 계속 움직인다. 옛 아담이 생명체라면(창세 2,7), 새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45절)는 것처럼, 자신 안에 썩지 않는 씨(42절), 영광스러운, 강한 씨(43절), 영적인 씨앗(44절)을 지니고 있기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분이시다. 이러한 묘사에서 바오로는 완전히, 유다인의 예측은 옛 아담과 새 아담의 대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영향에서도 자유롭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각각 지상과 천상의 계획에 결부되었다. 그러나 사도가 초점을 맞춘 곳은 새 아담이다. 우리 각자는 높은 차원에서 그분께 끌리고, 그분께 연결되었다. 사실 그분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고, 지상적인 것을 새로운 실체로 변화시키며, 살아있는 모든 것 위에 계시다. 늙은 아담이 생명을 받았다면(창세 2,7ㄴ), 새 아담은 자신 안에 생명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 첫 인간 아담은 “살아있는 존재”이며, 그에게 속한 이들은 그에게 통합되어 있고 그처럼 될 것이다. 새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시며, 그에게 속한 이들은 그에게 통합되어 있고, 하느님 성령의 힘으로(로마 1,11 참조) 죽음에서 부활하며, 그들의 온전한 인격에 생명이 주어질 것이다. 첫 인간 아담 안에 그의 씨앗이 활동하며 지상 생활을 살았던 것처럼, 새 아담은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성령으로 활기찬 삶을 나누며 생활하는 것이다. 영의 새로움, 영적 통합으로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18ㄴ)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데에 관심이 없고(34절), 오히려 지상의 현실로부터 천상의 현실까지(49절), 변화-영광을 위한 심리적 부활을 창조하는 데 노력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우리는 성령의 활동이기도 한, 썩지 않는 것에(52절) 집중해야 한다.
5. 생명을 주시는 영(1코린 15,45-49.50-58)
그러면 그분은 누구이신가? 분명히 새 아담,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분을 영광스럽게 하신 하느님의 영이시다. 그분의 추종자들로서, 모든 피조물은 이 새로운 상황을 나누어야 한다. 지상에 있는 동안, “하느님과 비슷한 모습”(창세 1,26)으로 창조된 모든 이들은, 시간 저편에서는(eschaton) 성령께서 주신 새 생명의 증인으로서, 시간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삶의 방식을 살아간다. 우리는 성령에 따른 삶에 대한 바오로의 성령론과 그리스도인 윤리의 핵심에 와 있다.
영적인 사람 안에서 씨앗은 고유의 옷을 지닌다. 곧 새로운 인간 역시 새 아담과 같은 천상적 인격의 옷을(2코린 5,2ㄴ),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가 알몸으로(3절) 발견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재림의 순간에 우리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썩지 않는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51-52절) 피조물의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물려받는 것이 허락된다면(50절), 총체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다.
단지 “물질적” 육신이 썩기 쉬운 까닭에, 몸과 피는 하느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세계에 결코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썩어 없어질 옷을 입었던, 새로운 생명이 주어진 그들은 죽음에서 불사불멸로, 썩지 않을 옷을 입을 것이다. 바오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수없이 말했고, 인류학적 낙관주의를 방불케 하는 견고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죽은 이들의 살아있는 맏물이신(1코린 15,20) 그분은 이미 썩지 않는 세계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왜 아직도 코린토 신자들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35절)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36절)
코린토 신자들은 이 새로운 알림을 계속해서 검토해야 한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고 변모되신 예수님의 역사적 신앙에서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 변모-변화를 위한 그들의 죽음-부활을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희망으로 각자는 자신이 견고한 기초 위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55절) 하는 “불변의”, “굳은”(58절) 신앙 안에서 자신의 하루를 구성해야 한다. 그분 안에서(57절) 죽음은 생명으로 가려질 것이다.(54절ㄴ 참조) 바로 그분으로서, 또 우리로서.
그리고 우리는 선교 사명을 부여받는다. 죽음을 넘은 승리는 사흗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던 케파, 열두 제자, 야고보, “칠삭둥이” 바오로가 지금 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어디에서든 알려야 한다.
2.7. 끝날 수 없는 종말까지
지금 이 과목의 끝에서, 초기에 우리가 상기시켰던 태양의 여정 이미지는 우리에게 다른 효과적 이미지들을 관찰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 각자 이미 어린이로서, 인간이 이렇게 약한 카누에 올라 열린 바다로 나아가고, 태양이 지고 구름이 솟아오르는 하늘로, 미래로, 미지를 향해, 확실함을 찾아, 수평선 넘어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것에 한 번 더 경탄해야 한다.
선조들의 지혜에서 우리는 밤하늘의 별들이 우리 형제와 자매들이 살고 있는 섬들로 여기게 되었다. 선조들은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빛을 주기 위하여 거기에 가 있는 것이다.(다니 12,3) 우리의 지상적인 온 존재가 그들과의 행복한 만남을 기다리며, 몇몇 알려진 기사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귀에 속삭이는 그들의 목소리를 읽는다.
피안을 넘어서 기다리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만남, 영원한 생명과 충만의 장소, 우리 희망의 섬이라고 설파한 선조들은 옳았다.
이미 이 세상에서 우리는 형제자매로서 우리의 스승이신 그분의 인도 아래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의 영 안에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함께 살 수 있다고 그분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의 구원으로 내어주셨고, 지금 하느님과 영원히 살고 계신 우리 삶의 닻이 아니신가? 우리도 끝없는 행복한 만남 안에서 영원하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각주:
1) 이 과목에서는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라는 세 개의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그 의미는 이렇다. 로고스는 토론의 내용이며, 그것을 설명하는 전체 추리이다. 에토스는 저자-필자의 권위이며, 파토스는 수용하는 입장에서 우선 로고스에 대한 열정을 가리킨다. 그 목적은 강요하지 않고 납득시키는 데 있다. Syn-pathos에 관해서는, 설명하는 이와 신봉하는 이 사이에 형성된 상호관계를 설명한다.
2) Litòte는 수사학 형태이다. 부정형은 긍정적 의미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그것은 효과적으로 설교하는 데 사용된다.
3) 사도가 애용하는 동기는 13절과 14절, 15절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사고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잠자는 이들은 깨어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4) 1테살 4,14ㄴ은 부활하신 하느님은 믿는 이들에게만 한정되어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오로가 부활에 대해서 자주 사용하는 자세는 “모두(pantes)”로 보편적이다.
5) “세 번째 날”에, 예루살렘의 치릴로, 「교리교육」(Catecheses) 14권 참조.
6) 마르 28,16-20, 루카 24,36-43, 요한 20,19-29, 사도 1,3. 참조.
7) 1코린 9,6; 로마 16,7 참조. 바오로는 열두 사도들로 제한하지 않는다. 바르나바스, 안드로니쿠스와 유니아도 사도들이지만 사도의 의미는 무척 광범위하다.
8) 이것은 사도 9,1-19; 22,6-21; 26,12-18과 관련된다.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1코린 9,1; 15,8) 그리고 갈라티아 신자들에게(갈라 1,15.16) 이 사건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경험 속으로 청중들을 연루시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춰주시기 때문에(2코린 4,6). 여기 인용된 본문의 역사적 인물 증언 가치에는 새로운 광범위한 합의가 있다.
9) 바오로는 자신을 그 시절 이전에 태어난 어린이, 직무에 자격 없는 자로 비교한다. 은유법은 민수 12,12와 욥 3,16, 코헬 6,3에서 택한 것이다.
10) 코린토와 그리스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영혼의 불멸을 믿는다. 그러나 육신의 부활은 부정한다.
11) 테르툴리아노는 이 성찰을 발전시킨다. 「부활하신 육신」(De resurrectione carnis), 48권.
12) 「에즈라 4」(4 Esdra) 3,7.21-22와 「라바 탈출기 3」(Esodo Rabba)(70ㄱ)에서 각각 증명되었다.
13) 필리 3,20-21과 에페 1,22는 “만물을 그분 자신에게 종속시키도록 그분을 가능케 하는 힘”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사상을 묘사한다. 히브 2,6-8과 시편 8,5-7 참조. 그리고 당신 적들의 복종은 시편 110,1, 피조물의 복종은 시편 8,7을 참조.
14) 테르툴리아노는 이 실천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부활하신 육신」(De resurrectione carnis), 48,11.
15) 요한 크리스토프와 토마스 데 아퀴노 참조.
(전교연맹, 2007년 Christ: Messiah and bringers of God\'s Kingdom 강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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