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시대와 역사의 개념
비토 델 프레테 신부
교황청전교연맹 사무총장
그리스도교는 역사에 뿌리를 둔 종교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기 원하시고, 마침내 ‘때가 찼을 때’(fullness of time)에 마리아의 태중에 당신 아들의 탄생을 준비하신 역사의 영역에 있다.(갈라 4,4) 성자의 육화는 고동치는 심장의 시간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가까이 다가온 신비의 시간이다.(마르 1,15 참조) 곧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기초이고 중심이시고, 그 의미, 그 궁극의 목적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역사의 궁극 목적, 완결, 의미, 중심, 기초, 고동치는 심장의 시간”이라 일컫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정의하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육화는 우주적 시대가 아니라, 역사적 시대 안에 일어났기에, 그리스도는 신화가 아니다. 구원에 대한 그분의 메시지는 시간을 완성하였고, 모든 것이 그분 안에 하나로 모였을 때 단 한번에 결정적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공동체는 그분을 모든 것의 시작(알파)이며 끝(오메가)이시요, 모든 인류 역사의 의미를 밝히고 그 방향을 가리키는 인류의 머리로 깨닫고 인정한다.
교회의 선교 활동은 이러한 역사적, 시간적 역동성 안에 뿌리를 내렸다.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하느님의 때를 위한 구원의 감춰진 계획을 모든 세대의 남녀들에게 끊임없이 전하고 있다.
1. 순환적 시간과 전통 종교들
종말은 새로운 시작, 새 창조를 따르게 된다. 시작은 유기적으로 그것을 앞서는 종말에 연결되고, 종말은 새로운 순환을 위한 필연이며 계속된다.
순환으로서 체험된 시간은 한 해의 과정이고 역사적 결정을 의미한다. 많은 노력도 인간의 조건을 개선시키는 데는 아무 소용도 없고, 모든 것이 이미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필연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사건의 과정 자체를 바꿀 수 없는 한 인간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역사는 인간의 자유로운 영역이 아니라 인간이 도망칠 수 없는 감옥이다. 과거에 일어났던 것이 또한 미래에도 일어날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운명을 거슬러 사건의 과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인간의 적개심, 반항, 오만함이 신적 명령에 충돌하고 그것을 정복한다.
미래를 위한 어떠한 희망도 없다. 모든 것이 운명으로 결정되었고, 영원히 순환하는 것이다. 존재했던 것과 그가 가졌던 것은 순환이 끝나는 순간 사라지게 될 것이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마지막 윤회에 파괴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나은 미래를 세워서 자신을 내맡길 이유가 없다. 어떠한 것도 인간이 완성해야 할 역사, 전달해야 할 소명을 부여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구원이나 자유의 가능성은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많은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서 그가 살고 있는 우주를 다스리는 법칙에 적응하는 데 있다.
인간은 단지 모든 것과 조화롭게 살도록 노력할 뿐이다. 이것이 전통적, 우주적 종교들의 기본적 특징이다.
2. 메타-우주적 종교 시대. 힌두교 - 불교
순환적 시간의 개념은 힌두교와 불교와 같은 대종교,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모든 종교들, 도교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기술한 1세기 당시의 일부 그리스도교 등에도 근거를 두고 있다.
2.1. 힌두교
모니스트교 범신론은 이러한 종교들의 특성이고, 당연히 힌두교에게 모든 현실은 하나이고, 신적 실체이며, 거기에서 모든 질료적 사물, 그리고 이들 가운데서 인간 존재가 발산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질료 세계는 현실적 실체를 갖지 못한 환영(maya)일 뿐이며, 반면에 인간 존재와 초월적 존재는 의식(purusha)이 있는 현실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
영적 인식(gnosis)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실제 본성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은 질료 세계에 맞춰 자리한 신적 실체의 섬광과 부분적 의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 모든 인간은 절대자의 발산을 통한 변형들이다. 우주와 모든 사물의 원인인 마야(환영)는 브라만에서 내려왔고, 바로 거미에게서 나온 거미줄과 같은 것이다. 마치 열이 불이 아니고 불에서 방사되듯이, 마야는 브라만과 일치하지 않지만 거기에서 방사되는 것이고, 그것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불행히도 인간은 즉시 마야에 유혹되어 자신을 놓아버린다. 인간이 그 원천에서 멀리 이동하면 할수록, 그는 총체적인 것에서 더 작아진다. 그러나 인간 영혼이 의식을 지닌 이래, 제한된 공간에서만 나는 구속된 새가 밖으로 나갔다가 새장 안에 보금자리를 틀듯이,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 거기에 합류하듯이, 소금이 물속에 녹듯이, 절대자에게 돌아가려 한다.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점진적으로 질료 세계와 자신의 육신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깨어나고 해방되어, 신적 본체의 광대한 대양, 브라만, 일치, 절대자, 전체, “what is”에 결합하려 한다. 브라만과의 결합은 영혼이 끊임없이 환생한 후 완전히 정화되어 죽은 후 승천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힌두교는 시간의 우주에 대한 순환적 개념을 가졌다. 그리스와 서양에 확산되었던 신화처럼 각 순환은 네 개의 시대로 구분되었다. 첫째는 “황금시대”이고, 다른 세 개는 윤리적, 종교적 퇴화의 과정을 따른다. 인간의 영혼은 이러한 삶의 맥락을, 그것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을 때까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오직 그때 인간의 영혼은 브라만과 일치하여 영원한 왕국, 오직 진실한 현실 세계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깨어날 것이다. 모든 것이 존재하고, 발생하며, 인간과 우주의 역사 모두 환영이며, 환영의 것이 다양하게 변하기 전에, 변하지 않는 유일-전체로서 브라만만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우주적 순환은 4,320,000년에 끝난다. 이 순환의 끝에서 모든 것은 불과 물로 정화되고 파괴된다. 그때 마야는 브라만의 품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긴 휴식 후에 마야는 사물, 인간, 사건들, 그 모든 것에 선행하는 존재에 일치하는 다른 주기를 시작하려고 브라만의 품속에서 다시 솟아난다. 이것은 영원한 반복이거나 시간과 사건들의 영원한 귀환이다.
이러한 개념, 시간, 역사에 그리고 그 인간 활동에는 가치도 없고 관련성도 없다. 전체적 인류의 역사, 그 고통, 그 정복, 인간애의 노력 등은 무의미하다. 실제로 모든 인간 활동의 결과는 새로운 동일한 주기를 위한 전제, 우주의 파괴로써 전멸되는 종말에 있다. 누구도 사실 계획, 또는 역사, 구원 또는 구속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 오직 인간이 이뤄야 할 사명은 그 피할 수 없는 과정을 달리는 순환의 굴레가 허용한 브라만과 일치하는 데 있다.
2.2. 불교
점점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의미를 찾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에서 그들의 존재와 운명의 해답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원하지 않은 이래, 동양의 종교들 특히 불교에서 그들의 내적 갈등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기를 바라고 있다.
불교는 고통과 번뇌, 따라서 환생의 끝없는 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의 길로 소개되었다. 불교는 인간을 마음의 평화와 내적 평화로 이끌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이기적 욕망을 끄는 방법을 보여준다. 바라지 마라. 그것은 고통과 번뇌가 되는 당신 존재에 대한 집착에, 욕망을 위한 당신의 탐욕스런 갈증에 있다. 명상을 통해 당신 자신에게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라. 그것은 물질적 현실이 순수한 환영이라는 것을 당신을 이해시킬 것이다.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동으로써 당신은 사리에 밝아지고, 당신의 내적 자아는 니르바나(열반)에 도달할 것이며, 존재의 무 또는 보편적 정신에 빠져버릴 것이다.
불교는 내적 생활, 자기 존재의 중심으로 귀환, 존재의 진리로 가는 길이며, 그것은 자유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 세상을 버리고, 가난과 정결을 생활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비구: monk). 이렇게 자각으로 이끄는 길에는 상처받지 않을 수 없는 모든 피조물, 모든 인간들에 대한 보편적 연민과 동정의 자세가 있다. 여기서 불교의 윤리는 탁월한 절정에 도달하며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서 발견한 근본적 의무와 비교할 수 있다. 어떤 이가 붓다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선임자처럼 보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인류의 역사적 국면에서, 개인주의와 집단 이기주의, 소비주의의 문화를 발생시키는 소유에 대한 갈증과 기술주의에 반하여, 불교는 모든 피조물들과 연대하여 동료라는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안으로서 제시된다. 인간의 물질적 견해와 겉치레적인 효율성만을 지닌 서구 문명에 대한 -서구적 문명뿐만 아니라- 근본적 판단이 불교에서 나왔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존재의 의미를 깊이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불교의 추종자들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기에 불교와 대화할 수 있는 만남과 협력의 기초적 장소가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시간과 역사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불교는 사도 공동체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적했던 것들 중에 하나인 영지주의(영적 인식)이며, 이는 인간의 참된 구원을 제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적 구원 신비의 허무로서 존재한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불교의 견해는 불완전하다. 자신의 힘으로만 존재하는 인간은 깨달음에 도달해야 하고, 깨달음을 통해서 인간은 무(無)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 안에는 악마, 원래 무, 환영이라 고려하는 물질세계와 정신의 기본적 이분법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이탈시키고, 부정적 과정을 통해서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완전히 버린 몇몇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작은 수레(Hynayana)에 따른 이유이다. 그러면 이 세상의 역사에서 인간의 의무는 무엇인가? 그의 궁극적 운명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불교는 어떤 대답도 주지 않는데,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인간 실현을 찾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인간을 당신의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죽음 뒤에 생명을 가져오시며, 종말에 영육으로 온전한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주시기로 계획하신 사랑이신 하느님, 인간에 대한 개념이 불교에는 본질적으로 없다. 붓다는 하느님에 대한 토론에 관심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불교에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적 특성인 사랑의 차원이 부족하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강생하셨고,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되셨으며,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돌아가셨다. 십자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신을 증여하는 사랑의 최상의 징표인데, 불교에는 십자가가 없다.
불교에서는 어떤 시대도, 어떤 인간 역사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불교는 물활론적 종교와 어느 정도 일치하며, 실제로 정신의 숭배로 힘과 조절 요소들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결정론적으로 반복되며, 자연의 순환에 인간을 불가피하게 끼어 넣는 개념이고, 인류의 사건과 자신의 삶의 과정을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이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였던 십자가의 죽음을 비난했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와 요한에게 단죄 당했던 영지주의이고 인간적인 지식이다.
3. 유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개념
누군가 종교 간 대화를 원할 때, 완전히 다른 근거를 가진 그리고 비록 앞의 표현들이 심오한 신비주의를 표현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수렴되지 않는 신앙 또는 개념을 같은 선상에 둠으로써 신앙의 개념을 축소시키지 않도록 고려해야 할 것이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성전인 성경은 완전히 다른 언어와 다른 개념을 지니고 있다. 유다교 민족은 다른 종교들이 지닌 순환적 시각을 깨트렸다. 이스라엘의 시간은 인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로 형성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걸으시거나 그들 앞에 계시기에(탈출 3,14) 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시간에 대한 의미는 그리스도교의 성찰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시간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고백한다. “그럼 시간이란 무엇이오니까?”라고 그가 묻는다.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하다 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 들자면 말문이 막힙니다.”(고백록, 11,14)
그는 창조 활동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시간을 창조하셨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In principium fecisti coelum et terram.)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따르면 창조와 창조주 하느님과의 관계는 창조와 시간의 경험 그리고 그 해석을 결정한다.
1. 인류 시간의 시작은 하느님의 시간에 병합된다. “주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창세 2,4),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 따라서 하느님의 시간, 또는 그분의 활동으로부터 인간의 시간이 그 기원과 꼴을 갖추게 된 것이다.
2. 구원 역사와 인간 역사는 상호 작용한다. 이스라엘의 주님에 대한 신앙과 그 역사 해석은 깊은 관련을 가진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시간을 항상 기억한다. “주님께서는 강한 손으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다.”(신명 6,21)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의 결과는 유일한 역사적 경험의 이차적 부분일 뿐이다. 이스라엘은 그 역사를 주님과 맺은 계약과 해방-구원의 연결로 본다. 그러므로 선조들에게 이스라엘 역사는 하느님께서 주님으로서 그리고 우주의 왕으로서 당신을 드러내신 장소이며 하느님 해방의 표현이다.
3. 하느님의 시간은 나자렛 예수의 오심으로 구원적 완성에 이른다. 역사에서 그분의 출현은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고, 하느님의 신비스런 모습이 계시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 13,8) “나는 처음이고 마지막이다.”(묵시 1,17)
4. 시간의 종말. 역사에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지배는 종말적 시간을 향해 움직인다. 부분적 해방의 연속은 전체적이고 결정적인 해방이 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28 참조) 날을 향하여 나아간다. 구약성경에서 역사에 대한 예언은 주님의 날(아모 5,18; 이사 2,6-22 참조)과 관련된 묵시론적 차원을 지니며, 이는 현재의 역사에 대한 궁극적 결말을 지향한다. 현재 시간과 구분되는 예수님의 메시지와 오심은 이미 최초의 구원과 “도래할 하느님 나라”와 시간의 종말을 포함하고 있고 더 구체화되었다. 인간 역사의 종말을 가리키는 “주님의 날”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많은 고통을 받으시고 인간들에게 버림을 당하신 후 영광으로 돌아오실 바로 그 날이다.
성서적 전승들은 세상과 함께하시는 역사 속의 하느님의 이야기와 체험을 서술하고 있으며, 약속, 계약, 노예 해방, 구원, 등의 하느님의 업적들로 종결되었다.
가. 이스라엘은 시간의 경험적 이해에 친숙했다. 분명히 주기적 또는 직선적 시간의 이론적 개념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사건은 모두 자신의 때를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심어야 할 때가 있고, 심겨진 것을 뽑을 때가 있고, 태어날 때와 죽을 때가 있는 것이다.(코헬 3,1-8 참조) 때가 없는 사건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것이 성경에서 시간을 복수형으로 말하는 이유이다. 모든 사건의 시간은 그것의 적절한 시간이고, 적절한 때(Kairos)는 한 사건이 일어나야 할 시점이며, 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 하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시간들을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계약에 연결시켰다. 시간의 리듬과 모든 사건들의 정확한 순간은 인간과 맺은 계약에 늘 충실하신 하느님의 성실함으로 결정되었고, 그것은 그분의 첫 번째 개입, 세상의 창조로 시작되었다. 거기서부터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시간 안에 있는 인류와 모험을 계속하신다.
나. 이스라엘은 계약의 역사에서 시간의 의미를 발전시켰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깨닫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사악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사건들은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의 백성을 선택하셨던, 탈출기의 사건들로 계속되었다. 탈출기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것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모든 것 가운데 단 한번 일어났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인 그것은 하느님 백성의 역사의 미래를 결정한다.
다. 이스라엘은 일련의 유사한 전체 사건들을 연결시키면서 그것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끊임없는 하느님의 활동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약속은 역사의 시작과 끊임없는 완성을 명시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직 하느님 당신께서 그것을 완성하시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다. “끊임없이 여러 가지 사건들을 만드시고 그 방향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사건은 새롭지만 그것은 앞선 것과 연계되며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길에서 과거는 미래를 선포하고 인도하기 위한 현재로 표현된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그것을 주기적으로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의하고 미래를 위한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다.
라. 종말론적 미래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약속으로 규정된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 43,3)라고 이사야가 말하였듯이. 하느님의 미래는 새로운 창조이다. 그것은 초기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확산도 아니다. 과거 역사와 약속된 예언자적인 새로운 미래는 같은 시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과거 시간들과 미래의 시간들처럼 대립된다. 그것은 시간들을 질적으로 다르게 분류한다. 그 일치는 오로지 인간 역사의 종결로 인류를 인도하기 원하시는 하느님의 성실에 기초한다.
마. 묵시록적 견해에서 과거와 현재는 불성실과 죽음의 시간이다. 미래는 정의와 생명의 시간이다. 그것은 그 시간적 범위 아래 일어나는 죽음과 생명, 상실과 구원, 빛과 어둠, 지옥과 천당 등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마치 두개의 힘처럼 각기 다른 것과 충돌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기의 생명을 전달하는 것은 ‘이미 이 상실의 단계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의 시간에서 구원되고 미래의 시간을 나누길 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각자의 태도이다.
바. 신약 성경에서 시간에 대한 이해는 메시아적이며, 핵심은 그리스도의 사건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현시대의 종말을 표시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께, 그리고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여명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시간의 종말, 악과 죽음으로 지배된 역사의 종말이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새로운 시간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새로운 시간, 메시아적 시간은 이미 옛 시간의 효력이 지속될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표현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로마 13,12) “만물의 종말이 가까웠습니다.”(1베드 4,7)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아직 모든 것 안에서 그 실현과 에너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가 새로운 창조의 이러한 여명을 “메시아적 시간”이라 부르는 것은 비록 우리가 존재하는 시간은 종말론적 시간이라 하는 완성된 시간이 아닐지라도 희망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메시아적 시간들은 약속의 시간들과 같은 선상에서 발전되었다. 그분의 인격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완성하신다. 적절한 시간,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갈라 4,4-5), 그렇게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의 희망을 완성하시고, 세상에 그 희망을 펼치셨던 것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방인들에게 메시아적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일어났다. 새로운 세상의 미래는 이미 현존하지만 하느님의 새 백성, 새 계약의 백성을 일치시키고 세우시는 말씀과 신앙으로는 아직 시작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시간들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과거 : 그리스도 이전은 더 이상 가치가 없고 그분의 현존 안에 존재한다.
현재 : 현재는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있으며, 그분 이전에 이미 은총, 화해 그리고 자유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래 : 미래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서 죽음으로부터 부활, 육신의 구속 그리고 영 원한 생명으로 우리 희망의 목표이다.
이것은 현재의 시간이 과거의 노예가 아님을 의미한다. 현재는 미래를 향해 던져졌다. 그리스도인, 신앙인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우며, 하느님의 미래에 열려 있다. 미래는 오실 그분의 현재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직선상의 해석으로 시간에 대한 현 시대의 낡은, 순환적 해석을 대신한다.
4. 시간의 주님, 그리스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말씀의 강생으로 하느님께서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심으로써 시간을 완성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기준이며, 역사의 새로운 지평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종말적 무한한 시간에서 현재의 무한한 시간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역사의 균형을 바꿔놓으셨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결정적 시간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건과 이 무한한 종말 사이에는 교회의 시간과 세상 선교의 시간이 있다. 이것은 인간과 우주적 역사의 새로운 이해를 가져왔다. “모든 이를 위하여 단 한번”(Once and for all), 있었던 하느님 아들의 강생, 수난,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대한 신앙과 사도적 교회의 신학적 성찰은 역사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중에 다시 오시어 영원한 현재의 마지막 순간에 해방을 가져다주시고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로마 6,10; 히브 9,12.28; 1베드3,18 참조.)
신앙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이러한 방법은 두 가지의 확신으로 이끈다. 그리스도 이전의 시간은 그 절정의 사건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하게 된다.(요한 1,1-15; 1코린 8,6; 「평신도 그리스도인」 1장 15항 등)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의 시간은 아직 사람들이 그 부활의 목표를 향해 건너고 희망해야 할 것을 모색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지주의의 경향을 피하고 현 세계의 시간과 화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원한 시간에 일치할 수 없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충만함에 관련된 인류의 마지막 시간에 지금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시간들과 시간의 다른 체험들은 창조로부터 영원한 나라의 충만함과 완성까지 역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업적에 의해 결정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인류와 세상을 파괴하고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다.
5. 교회의 선교
그리스도교의 개념만이 시간과 역사의 직선적 개념 안에서 선교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바오로 6세는 복음화 선교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인류의 역사적-종말론적 여정 안에 있다고 했다. ‘만민에게’(선교 교령)는 ‘인류의 빛’(교의 헌장)과 ‘기쁨과 희망’(사목 헌장) 사이에 온다. 교회의 선교는 모든 인류에게로 향하며 오직 복음의 힘으로 악마와 노예 상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문화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데 노력한다. 이것이 인간화와 해방의 선교이다.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맞추어 역사의 최종적 종말을 준비하고 이미 시작된 그 시대, 마지막 시대의 발자취를 따라 움직인다. 그 역사는 획득과 상실을 거듭하며 생명의 완성을 향해 영원한 시간으로 나아가는 역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와 역사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시기 때문이다. 이는 선교의 특성들이며 활동들이다.
5.1. 메시지 중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그리스도께서 시간과 역사의 고동치는 심장이라면, 교회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에게 베푸신 구원을 선포하고 증인이 될 때 참으로 복음화 하는 것이다. 구원은 결코 세상 안에서 실현될 수 없는 내재적 구원이며, “이 구원은 현세에 한정된 물질적 정신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어떤 구원이 아니다. 욕망, 소원, 사업, 일시적 싸움, 이 같은 것을 충족시켜 주는 그런 구원은 아니다. 참된 구원은, 모든 한계를 넘어 유일한 절대자이신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채워지는 구원, 현세에서 시작되지만 영원 안에서 완성되는 초월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다.”(「현대의 복음 선교」, 27항)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세상의 심각한 문제 해결들을 돕기 위하여 세상적인 시간을 택하지 않는다. 다만 시간과 역사의 심장이고 중심이시며, 이름과 얼굴을 지니신 나자렛 예수님의 인격 안에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오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은 하느님 생명의 참여자가 되도록 초대된 인류의 구원을 위한 본질이다.(「인간의 구원자」, 18항 참조) 성부께서 “때가 차자” 강생하시고 태어나신 영원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 개인에게 선포되고 제공된 이 생명은 인간 소명의 최종 완성이며,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영원하신 하느님에게서 오는 모든 운명의 완성이다. 그분은 인간 개인에게 당신 자신을 일치시키시면서, 일시적 존재 너머에 있는 구원을 제시하고 인간 존재의 깊은 의미를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그분 안에서 인간 존재와 우주, 정신과 물체의 변화가 그 충만함과 결정적 완성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시간적인 것들의 경계를 통과하고 사랑과 격려로써 이 지나가는 존재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인간 개인과 영혼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인간인 나와 관련이 있고, 그것은 교회와도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종말론적 신앙으로 활성화 되었기에 교회는 인간을 위해서, 그 인류를 위해서,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그 결과 모든 발전과 진행의 방향을 위해서, 그 선교의 본질적 요소를 배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간과 역사의 주님, 선교의 방법과 의미를 찾아야 하며, 오직 봉사로써 교회는 합법적으로 고려되고, 온 인류 사건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5.2. 선교, 예수님을 선포
“인류는 하느님에 대해서, 인간과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삶과 죽음, 진리 등에 대해서 모색하고 추구하던 모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 그리스도의 종교는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생활한 현존, 하느님의 역사에 인간을 결합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 바꾸어 말한다면 타종교가 일반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는 구신적(求神的)인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참되고 생활한 관계는 어느 종교도 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교적 종교만이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53항) 강생하신 말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의 인간애와 선하심이 나타났다. 그분께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심으로 시간과 역사의 궁극적 의미가 드러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살)이 되시어 하느님 사랑을 계시하신 근원적이고 결정적인 때(Kairόs)이시다. 여기에 복음화 선교의 필수적 의무가 자리한다.
이것이 불교와 힌두교와 같은 영지주의의 특징을 지닌 타 종교들과 그리스도교의 차이점이다. 타 종교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인간의 생각을 거스르는 스캔들이다. 이는 인간의 시간과 역사 안에 물체, 살(σαρξ)이 되신 하느님,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영이 되시어 영광을 받으시면서도 다시 질료적 육신을 택하신 그리스도 때문이다. 죽음의 부활, 새하늘과 새땅, 긍정적 결말로서의 역사의 종말, 모든 인간노력과 정복의 재실현은 영지주의의 구원과 양립할 수 없는데, 영지주의의 목적은 인간이 질료적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드는 이탈적 관점에 도달하는 것이고, 그래서 영혼은 전체에 융합되어 자신을 없애버리고 사라질 무거운 육신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질료 세계, 기술과 사고의 획득과 노력, 인간적 삶의 노력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그것들은 인간의 영혼을 눈 먼 포로로 만들며, 질료 세계와 육신은 우주적 요소들의 대 환란으로 파괴될 것이고, 불 또는 물을 몰고 오는 파괴는 정화를 의미한다. 지구가 시체들을 삼켜버렸을 때 그래서 별들의 추락 또는 물과 불로 일어나는 정화를 통해서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의 역사는 의무적인 길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무(無)를 향한 냉혹한 여정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순환, 하느님 시간과 인간 시간의 비 직선적 개념, 인간의 시간 속에 하느님의 시간을 개입시키려는 풍조로 되돌아가고, 도망가려는 유혹이 있다.
5.3. 그리스도교의 정체성 안에서 대화하는 선교
교회의 체험은 어떻게 오래된 두개의 유혹들이 가능한지 적절히 보여준다. 요한의 서간들과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경고한 첫 번째 올가미는 “그리스도와 시간”(Christ and Time)에서 오스카 쿨만이 영지주의의 유혹을 상세히 구분하고,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인 신앙 고백을 역사적 사실로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영지주의는 그리스의 순환적, 비 직선적 시간의 개념을 수용하였고, 구원의 역사로부터 이탈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개념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결국 구원의 가치는 없고 윤리적 가치만 있을 뿐이다. 시간 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인간성은 무시되고(그리스도 가현설), 영혼과 질료, 지상세계와 천상세계 사이에 화합될 수 없는 이원론이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육의 부활을 완전히 무시하는 소멸이 있다. 몇몇 그리스도인 작가들 가운데는 어떤 결부된 단점, 그리고 환생 때문에 육신 안으로 들어온 영혼이 마침내 모든 것이 소멸되면서 다시 새로워짐으로써 또 다른 존재의 순환이 시작된다는 영혼의 선재설을 믿는 이들도 있다.
인류의 시간에 하느님의 시간(카이로스)을 전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성서적 계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계속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을 수용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 후, 종말적 역사를 향해 그리고 그 안에서 현재의 역사를 연결하고 자리를 잡아주려 한다. 역사는 그리스도 사건에 준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르는 역사를 해석할 수 있도록 예언자적 소명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예언자는 인간의 역사와 하느님 시간의 놀라움과 새로움, 그 섭리 사이의 연관성을 평가하고 볼 수 있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계획을 묵상하면서 인간의 종말적 운명을 향해 인류를 인도하는 사람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시며, 세상의 심장이시라면,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복음화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들의 선교를 존중한다고 해서 또는 제시된 문제가 복잡하다고 하여 교회로서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인들도 그리스도의 신비의 보화를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을 교회로서 주장하는 바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53항)
그 다음, 시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의 두 번째 유혹이 있는데, 그것은 바오로 서간에서 비난한(콜로 2,6.10; 갈라 4,10) 거룩한 시간과 세속적 시간의 구분이다. 이교도에서 개종한 새 신자들은 엄격하게 축제를 지켜야 하는지 물었다. “세상에 속한” 요소들에 순종한다는 명목으로 어떤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처럼.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들은 새롭고 오래된 종살이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며, 특히 “축제, 새 달 또는 안식일”을 소심하게 준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다인들이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려 예수님께서 비난하셨던 내용이기도 하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르 2,27)
어떤 이는 인류가 하느님과의 단절로 잃었던 자유에 대한 전망을 그리스도교를 통해 되찾으려 하고 또 어떤 이는 다시 이 세상의 권력과 시간의 노예가 된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일치 조화를 예견하지만 인간 존재를 이 세상의 권력과 요소들의 종으로 만드는 자연, 전통 종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이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종말론적 차원을 모르고 규범과 법칙을 준수하는 데 자신을 한정시킨다면, 구원을 믿는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예언자적 역할, 선교적 차원과 희망의 선포를 배반하는 것이며, 증거를 보여주어야 하는 부분에 있어, 질문하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답변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인류의 빛’(교의 헌장)에서 시간과 선교
‘인류의 빛’은 하느님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함께 합류시키면서 창조에서 종말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 안에 기술하고 있다. 이 문헌은 특히 최근 몇 십년간 사이에 일어난 그리스도인 사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고 핵심적인 사건이다. 공의회 교부들이 교회법의 초안을 공인하였을 때, 그들의 관심은 오직 성인들의 적합하고 유용한 공경, 합법성을 확인하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몇 가지 사목지침서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남용에 대한 감시, 동시에 하느님 백성의 양성에 봉사할 수 있는 구조적인 면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 교회법의 운영에서 고무적이고 항구한 자극이 될 현실 입증과 이미 알려진 것의 설명으로 나와야 했다.
6.1. 종말론의 문제
신학적 사상과 사목 생활 실천 양면에서 종말론은 하느님의 사심판으로 발생하는 우리 운명과 우리의 지상 순례의 끝을 가리켰던 사건들, 죽음, 심판, 지옥과 천당으로 진술된 성 비오 10세의 교리교육처럼, 새로운 사건의 정신과 실재에 집중하는 데 그쳤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말론을 오직 이것에 국한시킴으로써 영성과 선교의 핵심에서 교회의 전승과 성경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비난하게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보상을 약속 받음으로써 그들의 스승들에게 이용당하며 의식을 마비당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영지주의가 아니고, 유토피아도 아니지만 진지하게 인류의 운명과 역사를 택한 종교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께서는 역사 안에 당신을 드러내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고 세우셨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든 구원 활동이 종말론적 전망에서 더 낫게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을 말하는 제2장에서 언급된다. 교회란 “사막을 헤매던 혈족 이스라엘이 이미 하느님의 교회라고 불렸던 것처럼, 현세를 거닐며 미래의 영원한 나라를 찾고 있는 … 이 교회는 모든 지역에 전파되도록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지만 동시에 시대와 민족의 경계를 초월한다.”(교회 헌장, 9항)라는 감동적인 언어로 확언한다.
문헌에 흔히 사용된 이미지는 요즘 너무 많이 사용되고 있는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의 모습이며 그것은 결코 고정되지 않는 빛과 완성을 향한 여정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교회는 인류와 함께 역사의 목적을 완성하도록 세워졌고, 그 목적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하느님을 통해서 인류를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채우는 것이다. 그 날은 그분께서 모든 실제를 변화시키실 마지막 날,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이 될 때까지 주님의 오심과 드러나심을 모든 것 안에 간직하고 예언한 주님의 날이 될 것이다. 이것이 신자들의 희망이고 그들이 세상에 알려야 할 희망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인류 한 가운데서 그리고 인류에게 희망의 씨앗이고 표징이다. 더 바르고, 우애적이고 발전된 세상을 세워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서약은 하느님의 계획에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속되어야 할 의무이며,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참으로 다가오고 완성되어야 한다. 또한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해방되고 구원되어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인류의 빛’ 제7장의 첫 번째 구절에서 선포되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모두 그리로 부름 받아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덕을 얻게 되고, 만물이 새로워지는 시간이 올 때에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인간과 밀접히 결합되어 인간을 통하여 그 목적에 이르는 온 세상도 인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될 것이다.”(교회 헌장, 48항)
6.2. 하느님의 나라(왕국)
성경 전체, 특히 예언서, 신약성경과 묵시록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인류와 온 세상을 사랑과 성실로 운영하시는 하느님 당신 자신이시다. 임금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실한 추종자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고 사랑으로 봉사하시며, 그들을 행복하게 하고, 당신의 거룩한 현존으로 채워 주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임금이시다. 그리고 약속된 왕국은 행복과, 정의와 평화가 완비된 왕국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이미 마지막 시대에 있으며, 우리는 인류의 첫 번째 단계와 세상이 끝나고, 그래서 두 번째로 들어갈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날이며 영원한 안식일로 묘사된, 주님께서 오시고 드러내실 마지막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타향살이를 하면서 축복된 희망을 찾고,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왕국으로 가는 길에 있는 것은 참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이들이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고(요한3,1 참조), 비록 우리가 아직 영광 안에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뵙지 못했을지라도(콜로 3,4 참조),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요한 3,4 참조)(교회 헌장 48 참조) 인류의 생명과 우리 생명의 목적은 열렬한 사랑으로 그분의 생명을 끊임없이 나누는 것이다.
이미 왕국에서, 왕국을 위하여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은 충만한 오심을 기대하면서 살고 있다. 이는 우리 삶의 기쁨과 슬픔, 고통에 그 의미를 부여하는 시대, 깨어서 기다리는 시대이다. 이것은 선교의 시대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때, 모든 것이 완성될 때 끝나게 될 시대이다.
6.3. 역사의 목적
지난 세기 초반에 개신교의 한 신학자와 그를 따르는 가톨릭 신학자들이 특히 심판과 부활의 시기와 관련된 교리, 종말(novissimi)에 관련된 전통 교리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논쟁은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인간의 영적 요소가 하느님 안에서 생존하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그들이 말하듯이 영혼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영육이 결합된 인간은 죽음 후 바로 하느님 앞에 나타나야 한다. 영혼과 육신을 분리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를 항상 육신과 영혼의 일치된 존재로 보는 성서의 정신이 아닌 희랍-헬레니즘 사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죽음을 통해 심판이 아닌 생명이 단절되고 영혼과 육신은 마지막 심판 날에 부활을 기다린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영혼의 불멸을 말할 수 없지만 종말에 일어날 부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칼 바르트는 시간과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 차원을 유지하면서 그 장애물을 비켜갔다. 죽음으로부터 인간 개인은 즉시 부활한다. 두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개인 단계의 종말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은 이를 위해 희생과 제물을 봉헌하고 기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재검토되어야 할 교회의 낡은 관습이다.
‘인류의 빛’은 분명히 교회 헌장을 재확인하였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럽게 다스리기 전에 모두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2코린 5,10)”(교회 헌장, 48항) 그것이 육신의 갱생을 간절히 바라면서 주님의 사랑을 이미 누린 영혼의 생존이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광대극이나 법적 거래도 아니고, 참으로 인류 실현의 완벽한 완성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빛을 받을 때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죽음 후 하느님의 심판이 있고, 그것은 항상 피조물을 위한 사랑과 자비의 심판이며, 그분께서는 피조물을 영원하고 성실한 사랑으로 사랑하셨으며, 육신의 부활로써 모든 인류를 새롭게 하셨다.
세상의 종말에,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 설립될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 그리고 그분께서 오셔서 “당신의 성도들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 칭송을 받으실 것입니다.”(2테살 1,10)(교회 헌장, 48항)
육신의 부활과 소위 말하는 공심판은 하느님의 왕국에서 모든 인류가 새롭게 되는 모든 피조물의 목표인 주님의 날로 묘사되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완전할 것이다. 죽은 이들의 부활은 그리스도교의 완전하고 적합한 면이다. 부활한 인간은 영혼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구원된 존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비물질적 영혼, 영적인 육신을 갖게 될 것이고, 그것은 더 이상 생물학적 음식(그들은 하느님의 천사처럼 될 것이다.)이나 또는 공간과 공간에 구속된 주체가 아니다. 부패의 씨를 안고 있는 육신이 썩지 않고 부활하는 것이다. 바오로 성인이 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적었듯이, 죽을 육신이 죽지 않고 부활하는 것이다.
7. 신학적 조직화의 시도
근래 몇 십 년 동안 종말론은 가장 관심 있는 실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신학적 성찰의 중심이 되었다. 역사 과정에 연루된 인간, 그 개인의 운명은 하느님과 인간에게 속하며, 모든 존재가 추구하는 그 목표는 그리스도교의 계시 중심부에 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시대와 장소의 인류를 포함하며, 그 목적은 창조의 완성에 있다. 그분께서는 시작이시고, ‘알파요 오메가, 시작이요 끝이다.’ 그분 자신이신 피조물의 목적에 향하도록 이끄신다. 창조는 구원과 사랑의 첫 번째 행위이고,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하셨던 의도대로 그분께 돌아갈 때 끝날 것이다. 비록 역사가 인간 존재로 자유롭게 창조되었을지라도 역사는 그분께서 마련하신 목적을 향하여 의심할 여지없이 관리되고 방향 지워진다. 이것이 그분께서 탈출기 안에 개입하신 이유이고, 인간 역사의 중심이 되시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충만하게 전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박해, 고난, 혼미 가운데서도 확실한 희망인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고통과 죽음이 정복되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고, 하느님께서 땅과 하늘이 존재하게 한 이래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이 있게 될 때, 그들은 하느님의 날을 향해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이러한 과도기에 교회는 그리스도 지체의 중심으로서 하느님의 보편 계획이 실현되도록 함께 일해야 한다. 우리는 인류의 중심인 문화, 종교와 활동에 세워진 교회의 선교 시대, 종말론적 시대, 마지막 시대에 있고, 교회는 거기에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심어야 하고 증거를 보여야 한다. 참으로 교회의 선교는 하느님과 이웃과 함께하는 친교에로 모든 백성들을 이끄는 데 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으로 영광스럽게 오실 때에 선교는 끝날 것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그분 영광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주님의 날은 기쁨의 날이어서 그때 모든 이는 그분께서 하신 모든 업적에 대해 찬미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숭고한 사상의 결핍은 인간의 삶과 역사의 여정에 관한 의미상실을 초래했다. 그리스도교적 전망은 권태로운 삶에 희망을 준다. 우리는 희망하는 백성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류와 우주를 위해 준비하신 미래를 확신한다.
7.2. 교회의 선교 시대
교회의 복음화 선교는 무엇보다 먼저 본질적으로 희망에 관한 것이며, 교회 안에 있는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느님과의 새로운 약속과 희망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는”(「현대의 복음 선교」, 28항) 희망이다. 교회의 희망은 유토피아적 희망이 아닌 인류를 위한 희망의 씨앗인 것은 그 희망이 인간의 예언, 계획 또는 노력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자유롭게 변화시키시려는 하느님의 성실성에 기초한 확실한 희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주고 가져오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의 선교이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이 희망을 거슬러 음모를 꾸미는(그들 가운데 하나가 우리 시대인 것으로 보인다.) 시대가 존재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세기는 우주적 차원에서 대단한 모순과 불의를 가지고 시작되었다고 말하였다. 오늘날 복음의 설교가들, 그리스도인들도 사도들처럼 묻는다. “주님, 이것이 이스라엘의 회복기입니까? 당신께서는 과거에 계셨던 분, 현재 계신 분, 앞으로 오실 분이십니까? 아니면 우리는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그리고 그분께 우리의 운명과 인류의 역사를 맡겨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묵시록에서 그 대답을 발견한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이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5,9-10)
오늘날 주님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힘차게 이끄시며, 역사를 그 마지막으로 인도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묵시 22,13)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제, 오늘 그리고 영원이시다.
주님의 날이 역사의 종말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춰진 새 예루살렘, 거기에는 더 이상 슬픔과 눈물, 또는 고통과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희망을 전하고 증언해야 한다.
8. 영성과 사도적 자세
1) 이 인류와 우주는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되고 사랑받는다는 것을 깊은 인식해야 한다. 그들은 그분께서 손수 만드신 작품들이다. 그들의 운명은 그분 손 안에 있다. 그분께서는 이들을 충만한 완성과 그분의 영광의 찬양에로 이끄실 것이다. 이것이 그분의 구원 계획이다. 복음의 일꾼들은 하느님의 이러한 구원 계획에 공동 일꾼으로 참여한다. 이것이 교회가 하느님께서 교회에게 맡기신 것 외에 교회 자신의 완성을 위한 어떤 사명도 수행할 수 없는 이유이다. 곧 하느님의 선교이다.
2) 그들의 의무는 시대의 표징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 안에서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개입을 보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역할은 하느님과 인간 존엄성에 반대되는 것을 고발하는 것뿐만 아니라, 현대의 개별적 존재 안에서 인류의 긍정적 진보와 성령의 획득도 밝혀내는 것이다.
하느님의 역사를 읽고 시대를 고찰하는 자세로, 그분의 얼굴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인류의 역사를 섬세하고 주의 깊게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회의”에 참석하게 될 것이다.
3) 희망의 증인이 되고, 생활하자.
희망은 깨지기 쉽고 진귀한 필수품이며, 그 열정은 믿은 이들의 가슴에서조차 아주 낮게 드러난다. 샤를르 페기는 이미 이렇게 이해하였다. “작은 희망은 ‘신앙과 자비’라는 그의 큰 두 자매들 사이에서 나오며, 그 자체에 주목조차 하지 않는다.”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자매는 큰 두 자매들 손에 이끌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희망은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그리고 희망은 활기차고 순진한 기쁨으로 부활 아침의 신앙과 사랑을 가져온다. “모든 것을 가져오는 작은이는 바로 희망입니다.”(샤를르 페기, “Il portico del mistero della seconda viertu\", cit. by CEI, traccia di Riflessione, Convegno Ecc. Verona) 만약 모든 이의 가슴에 희망이 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그리스도교 희망의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만나고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행하는 종교를 따르거나 사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는 것, 메시아니즘의 어떠한 묵시록적 형태의 불신으로 이끌지 않는 희망이다. 이 희망은 날마다 인내와 노력으로 인간 품위에 반대되는 문화적 형태와 생활 방식을 변형시킴으로써 인간의 도시를 건설하도록 우리를 촉구하고 있다.
4) 복음의 일꾼들은 하느님의 시간을 존중할 줄 안다. “그분의 왕국이 올 수 있도록”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일하는 것이 옳지만 그 날과 시간은 아버지께서만이 알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일꾼들은 모든 것이 그분께서 정하신 시간과 방법 아래 잘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하느님의 인내심을 지녀야 한다.
5) 복음의 일꾼들은 언제나 신뢰와 성실로써 강생하신 말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며,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의 창조자, 중개자, 근본 원리이심을 확신해야 한다.
(전교연맹, 2007년 \'Biblical tiem and the conception of history\' 강의 참조.)
다음글
이전글
목록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