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제1차 아시아선교대회 안토니오 주교 강연

등록일

2007.10.01

조회수

2,392

제1차 아시아선교대회
2006년 10월 19-22일, 타일랜드 치앙마이,
아시아의 예수님 이야기


“아시아의 선교 : 예수님 이야기를 하다”


루이스 안토니오 G. 태글 주교/ 필리핀 이머스 교구의 교구장

아시아선교대회는 선교사가 되라는 교회의 부름을 수행하는 기회입니다. 이미 아시아에 자리한 교회는 선교사들의 행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용기 있는 증거와 믿음과 사랑으로 끊임없이 선교에 주력해 오심을 함께 기뻐합니다. 온 세상에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명령에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맡기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에게는 풍요로운 교회의 전승에 충실할 뿐 아니라 아시아 민족들이 직면한 현실에 응답할 수 있는 선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에게 시급한 일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부터 기록된 이 다양한 계층과 특성의 역사는 교회가 이해하고 실천했던 선교의 많은 방법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인 교회는 보편적이지만, 실로 독특한 역사들과 상황들을 지녔기에 아주 독특한 선교 경험과 개념을 지닌 지역 교회들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덧붙여 말할 수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단순하고 복잡한 현실인 선교는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선교 교령’의 기본 시각을 확인하였습니다.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 적합한 선교 방법을 교회의 역동성과 함께 계속 모색하면서 우리 대회는 아시아에서 예수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선교의 이해와 실천을 제안합니다.
이야기는 결코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말하거나 서술되거나, 기대하며 경청될 때 진정한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날, 이야기 전개(storytelling) 가운데 하나는 나눔입니다. 「아시아 교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 민족들과 함께 주고받을 수 있는 선물로서 예수님 안에서 신앙의 빛을 나누는 선교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눔은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역사와 서사시에 뿌리를 내린 문화와 종교의 대륙, 아시아에서 이야기 전개는 선교를 이해하기 위한 독창적인 틀을 제공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또한 아시아에서 예수님을 선포하는 우선적 방법으로서 아시아 문화적 형태들에 유사한 이야기체(narrative) 방법들도 인정하였습니다.(「아시아 교회」, 20항)

◆ 이해하는 ‘이야기’와 말하는 이야기

이야기 없는 인간 생활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삶 자체는 이야기체 구조를 지녔습니다. 이야기는 삶과 그 의미를 중재합니다. 이야기 전개는 우리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고,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그 의미를 충분히 성찰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학자들은 그들 각자의 분야에서 이야기체의 역할을 재발견하였습니다. 신학과 영성은 이러한 ‘이야기로 돌아감’으로써 혜택을 받았습니다. 선교도 동시에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이야기와 이야기 전개를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저의 발표는 완벽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보고서는 예수님 이야기를 함으로써 선교 이해에 관련된 모습들만 강조할 것입니다.

1. 좋은 이야기들은 경험에 기초한다

좋은 이야기들과 나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항상 이야기꾼(내레이터)의 방식이나 이야기 결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믿을 만한 이야기, 진실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원합니다. 진실의 튼튼한 기초는 첫째 이야기꾼의 경험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에 대하여 신뢰할만한 보고자들을 인정하지만 사건이 인물의 일부가 되려면,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거기 있었던 누군가의 이야기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체험일 때 가장 잘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2. 이야기들은 그 정체성을 띤 사건들, 민족,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야기들은 우리가 누구이며, 삶의 의미와 흐름, 우리가 가는 곳을 드러냅니다. 나의 이야기는 나의 자서전이며, 큰 조직의 상황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입니다. 내가 나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할 때, 나의 기본적인 삶 이야기는 듣는 이에게 뿐만 아니라 먼저 이야기하는 나 자신에게도 드러납니다. 나는 내 자신의 의미를 만듭니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나에 관한 것이 아닌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실현됩니다. 그것은 항상 다른 민족, 나의 가족과 친구들, 사회, 문화, 경제 또는 ‘시대’라 부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공허하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민족들과 내 시대의 이야기들에 투신했기에 나인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들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의미도 만듭니다.

3. 이야기들은 역동적이고, 재해석과 재구성과 변형에 개방되었다

개인적 정체성은 기억 속에 들어온 세계와 상호작용함으로써 형성됩니다. 기억은 자기인식이 커지기 바라는 것처럼 생생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기억합니다. 기억은 단순한 연대기보다 이야기들을 만들고, 이야기들은 경험들을 마음속에 떠올립니다. 기억해냄으로써 과거가 모두 정지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우리를 형성합니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새로운 시각의 빛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다른 양식으로 전개합니다. 이야기들은 과거에 형성된 우리를 바꾸어 놓고,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 놓으면서 현재 우리가 어떠하며, 어떻게 형성되는지 드러냅니다. 이야기들을 통하여 우리는 개별적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역동성에 감동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변화되었고, 얼마나 많이 변화시켜야 합니까.

4. 이야기들은 이해할 수 있는 영적, 교리적, 윤리적 상징들을 위한 배경이다

이야기들은 한 개인의 가치, 윤리 규범과 특권들을 표면화함으로써 개별적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개인의 영성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개인에게 소중한 윤리적, 영적 그리고 교리적 상징들은 개인의 삶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그러한 깊이 살아있는 상징들은 이야기가 알려지고 들려질 때만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야기들은 한 개인의 신앙과 윤리적 상징의 의미에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5. 이야기들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지금까지 이야기와 개인적 정체성에 대하여 말한 것은 공동체의 정체성에도 해당됩니다. 공동의 경험과 기억들은 유일한 개개인들을 결합된 지체로 묶습니다. 공동체의 특권적 이야기체는 그 공동체의 가치, 윤리와 영성의 핵심이 됩니다. 그 공동체의 단원들이 공동으로 취하고 사랑한 이야기들 속으로 우리가 들어갈 때 공동체의 특징적인 신앙, 예법, 거행, 관습, 생활양식 등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6. 이야기가 수용될 때 청취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

중요한 경험들은 이야기가 되고 이름이 붙여집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의미 있는 무언가를 경험했을 때,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합니다. 이 역동성은 이야기란 청취자를 요구하고,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자신의 이야기는 청취자 안에서 비슷한 경험의 기억을 일깨우고, 새로운 의미를 열며, 잠에서 흔들어 깨우고, 놀라움을 일으킵니다. 이야기꾼의 말이 끝날 때 청취자의 대답과 약속이 시작됩니다. 항상 좋은 청취자가 좋은 이야기꾼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창출하는 데에서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청취자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집니다. 청취함으로써 자기 자신 안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엮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확실하고 풍요롭게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7. 이야기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이야기는 사실상 말하지 않을 때조차 많은 방법들로 말할 수 있습니다. 구술 화법은 아직도 가장 공통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들은 서한, 소설 또는 시 등 집필을 통해서도 말해질 수 있습니다. 사진과 비디오 제품들은 이야기 전개의 영감을 받은 기술적인 방법들입니다. 한 개인의 동작, 습관, 목소리의 어조, 얼굴의 찡그림, 몸짓 등은 이야기에서 어떤 특성으로 표현됩니다. 한 개인의 침묵은 이야기 전개의 강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자세, 생활양식과 관계 등은 이야기를 전개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낳습니다. 한 공동체의 춤, 음악, 예술, 건축과 음식 등은 이야기의 본질적인 요소들입니다. 이야기들은 화법의 많은 방법들에 열려있는 만큼 풍성하게 구성됩니다.

8. 이야기들은 억제될 수 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할지라도 어떤 요인들은 이야기 전개를 억압할 수 있습니다. 상처 깊은 기억, 부끄러움과 죄의식을 불러오는 고통은 그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함으로써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괴로운 경험을 겪은 뒤 최소한의 품위를 보존하려고 피해자는 어떤 이야기가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과 기억의 일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독재자들은 자신의 제국이 위태롭게 될까봐 부패, 탄압, 살해와 파괴에 관하여 이야기를 못하게 금지합니다. 그들은 대중매체로 국민을 매수하고 진리를 밝히기 원하는 이들을 탄압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나쁘게 조명할 기억들(기록들)을 지우도록 국립 역사관에 강요합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변화를 불러일으키려는 청취자들에게 말하기에 아주 위험합니다. 매일 전쟁하는 맹렬한 투쟁들로 이야기가 넘칩니다. 그러나 치료는 가능합니다. 피해자들이 친구들, 연민과 이해로써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상담자 또는 전문가에게서 그들 자신의 가치를 서서히 되찾습니다. 그들의 참된 이야기를 되찾는 공동체에서 그들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그들의 힘도 되찾습니다.
우리는 선교의 이해와 실천을 위한 그 가능성을 밝히려고 이야기와 이야기 전개에 대한 성찰에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 아시아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선교

초기에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선교 교령에서 “순례하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다. 교회는 성부의 계획에 따라 성자의 파견과 성령의 파견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2항)라고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완성하셨던 것이 모든 것 안에서 그 효과를 완성할 시간에 와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교회 안에서 그리고 내부적으로 그분의 구원 사업을 진행시키려고 성부에게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선교 교령, 3-4항 참조.) 그러므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말씀하셨듯이(「교회의 선교 사명」, 3장 참조) 성령께서 선교의 주역이시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적절합니다. 교회에 위임된 선교를 완성하도록 교회에 힘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아시아 교회」, 43 참조.)
이러한 전망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선교는 하느님 당신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야기의 화자”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삼위는 예수님께서 다른 위격에 대해 “이야기하심”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3-15) 교회의 선교는 성령께서 예수님과 아버지의 것을 밝히시는 이야기의 결실입니다. 교회의 선교 원천은 위대한 말씀 전달자이신 성령이시며, 그분에게서 그것을 들어야 하고 그래야 들은 것을 나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께 들은 만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하느님의 전달자이십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해야 할 그 교회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정확하게 지적하였듯이(「아시아 교회」, 19) 아시아에 던진 중요한 질문은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는 가’입니다. 선교의 ‘어떻게’라는 형태는 예수회의 마이클 아말라도스와 같은 많은 아시아 신학자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야기 이해에 대한 우리의 성찰 몇 가지를 통해 성령의 인도 아래 예수님 이야기를 전개하는 선교를 고찰해 봅시다.

1. 교회는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경험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

아시아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이야기꾼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 효과적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오늘날의 민족은 대개 교사들보다 증인들을 더 신뢰하지만 문화를 각별하게 여기는 아시아에서는 경험으로 확인된 충실한 증거들을 더 강조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아시아인들이었던 초기의 사도들은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그들이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살펴본 것, 손으로 만져본 것(1요한 1,1-4 참조) 등 그들의 경험들을 말하였습니다. 그 당시 아시아 교회를 위한 어떤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께 대한 깊은 경험 없이 어떻게 내 개인의 이야기로 그분에 대해 설득력 있게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성인의 경험이 참으로 선교의 뿌리가 되는 것은 그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때입니다. 아시아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기도, 예배, 민족 간 상호 작용, 특히 가난한 이들 그리고 ‘시대의 표징’을 구성하는 사건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교회의 생활을 요구합니다.

2. 예수님 이야기는 아시아의 문화와 종교,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야기가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듯이, 예수님을 믿는 이야기는 신앙인으로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정체성도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증인은 구세주의 제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개인의 이야기나 정체성이 그를 형성하는 민족, 문화, 사회적 흐름과 그물망처럼 관련된 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인 전달자는 다른 이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역사는 다양한 종교들과 다문화의 사람들과 떨어져 있지 않고 항상 함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아시아인으로서 그들의 정체성과 역사를 결정하는 아시아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조나단 윤가 탄은 아시아의 이러한 현실은 ‘만민을 향한 선교’(missio ad gentes)가 새로운 패러다임인 ‘만민들 간의 선교’(missio inter gentes)에 따라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고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만민을 향한 선교’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만민들 간’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민족을 ‘향한’(towards) 진정한 선교 없이, 민족과 ‘함께하는’(with) 선교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민족과 함께하는 진정한 선교는 민족을 향한 선교를 격려합니다. 가난한 이들, 문화 그리고 종교들과 함께하고, 그들 가운데 있는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아시아인들입니다. 가난한 이들, 문화 그리고 종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위한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이야기들의 혼합은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 문화 그리고 종교들과 함께하는 대화로서 선교에 대한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의 수많은 성찰들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3. 교회는 활기차게 생생한 예수님의 기억을 보존한다

교회는 다른 아시아인들 가운데서 생생한 예수님의 기억을 지키는 방법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기억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만질 수 없는 영역에 가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재충전하고 나눌 때 지켜집니다. 보편 교회의 전통에서 보장한 기억에 충실하고, 성령을 신뢰하면서 아시아 교회는 아시아 현실의 재생을 위한 그 가능성을 자유롭게 하고 그 생명력을 만회하면서,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새로운 방법을 재발견하는 데 용기를 가질 것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박물관의 소품처럼 보관할 때, 거저 주는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아시아 교회」(19-20,22항)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특히 신학자들에게 아시아 감각에 가까운 예수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교수법을 모색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분은 똑같은 이야기를 새로운 전망과 새로운 상황에서 말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4. 예수님 이야기는 교회의 신앙고백(symbols of faith)에 의미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야기들이 한 개인이 받아들인 영성, 윤리 그리고 신념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그들에게 힘을 주는 이야기를 잊어버린 채 교리, 윤리, 예배의 어떤 ‘표준화’되거나 또는 고정화된 상징들처럼 획일화된 교회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신앙고백 자체들은 민족을 감동시키는 힘을 잃어버립니다.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근원적 이야기에 깊숙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체성사에서 빵을 쪼개는 것은 나눔, 배려와 친교의 많은 이야기들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므로 이야기 없는 예배는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한 주교의 반지는 공동체에 봉사하는 생생한 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이야기 없이 반지는 하나의 보석류로 축소됩니다. 백성에게 유용하고 활력 있는 이야기에서 나온 예수님의 현존으로서 한 사제의 상징성은 그 이야기가 없다면 성직이란 그저 성소보다 나은 신분 정도로만 여겨집 니다. 신앙의 상징(신앙고백)은 예수님의 근본적인 이야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이야기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시아 교회가 그 교리, 예배와 상징들에 첨부된 이방인의 인상을 바로잡는 것도 가능하게 합니다.(「아시아 교회」, 20항) 예수님의 원천적 이야기에서 분리된 교회의 상징들은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낯선 이야기만을 하게 될 것입니다.

5. 예수님 이야기는 교회를 형성한다

우리가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야기들은 또한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공통된 경험과 기억에서 공동체들은 단결과 공동 가치를 발견합니다. 성령을 통해 전개된 예수님 이야기의 공통된 기억은 아시아에서 교회 신앙의 정체성과 일치를 이루는 기초적 원천이 될 것입니다. 성서들,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 교의, 예배와 전승 전체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핵심인 그분의 기억을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예수님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법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의 감각은 그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교회를 고립시켜야 한다는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만든 예수님 이야기는 전체 공동체가 나누어야 할 공통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전개의 패러다임에서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인 이야기를 하는 데 실수한다면 그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교회가 선교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FABC의 확신이었습니다. 지역 교회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데 헌신하기 위해서는 성령께 받은 많은 선물들을 분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이야기의 열매인 모든 교회는 그 이야기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6. 경청하는 교회가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들은 청취자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러나 강요된 이야기들은 경청되지 않습니다. 아시아 교회는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생각도 강요하지 말고, 교회가 제공하는 이야기의 생명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개방된 이들을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아시아 교회」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선물을 나누는 것은 개종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민족들에게 봉사 활동을 하는 만큼 주님께 순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0항 참조.) 이야기를 하고 감동하게 합시다. 성령께서 청취자의 마음과 기억을 열어주시고, 그들을 변화시키도록 합시다. 아시아의 가난한 민족들의 군중은 예수님 이야기에서 연민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 문화들은 혼란스런 도전으로써 예수님 이야기의 참된 자유에 공명될 것입니다. 아시아의 다양한 종교들은 예수님 이야기에서 그들의 하느님 추구와 참된 거룩함을 향한 존경과 인식에 놀랄 것입니다. 아시아 교회는 청취자들을 감동시키시는 성령을 겸허하게 따르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성령의 이야기꾼으로서 아시아 교회는 청취자들의 언어와 그들 세계로 들어가고, 바로 그 안에서 성령강림에서처럼 예수님 이야기를 그들에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아 교회가 모든 것을 의미 있게 말하려면 성령께, 그리고 가난한 이들, 문화와 종교에 기꺼이 귀 기울이는 자가 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교회는 경청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7. 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 교회는 아시아인들의 가정, 이웃, 종교와 전통적 지혜들에서 얻은 이야기 전개의 풍성한 유산으로써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데 창의적일 수 있습니다. 거룩하고 윤리적이며 정직한 생활의 증거는 아직도 아시아에서 예수님께 관한 가장 좋은 이야기입니다. 거룩한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순교자들의 생애는 예수님 이야기가 어떻게 개인과 공동체 안에 새겨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복녀 캘커타의 데레사처럼 이웃 봉사에 자신을 헌신한 남녀들은 아시아 민족들이 듣고 싶어하는 생생한 이야기들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변호, 정의를 위한 사업, 생명의 존중, 환자 보살핌,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 중재, 외채 탕감과 창조물의 보호 정신 등은 오늘날 아시아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재개하는 몇 가지 방법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예수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방법을 받아들이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8. 교회는 억압된 이야기들의 목소리이다

아시아의 지역들 대부분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탄압에 관한 이야기들은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 여아들, 여성들, 난민, 이주민, 소수 민족들, 원주민들, 다른 유형들의 자국 희생자들, 정치적 인종적 폭력과 환경 등 그들 소수의 이야기는 억압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들이 할 이야기들을 두려워합니다. 아니면 진리와 진리가 요청하는 것을 듣기를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교회는 때로는 무관심하게 들리고 금지되었던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그들의 억압된 이야기들 사이에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자신이 목소리 없는 이의 이야기꾼이 되어 그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선교는 이미 아시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숨겨져 있어도 많은 아시아의 형제자매들의 생활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탄생시키는 성령의 많은 전달자들을 기립니다.
저는 하느님 나라의 전달자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돌아감으로써 끝마치려 합니다. 그분을 바라봅시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분에게서 배웁시다. 그분의 이야기와 그분의 전달자에게 우리 자신을 열어놓읍시다. 그분의 이야기는 그분께서 체험하신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주신 충만한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의 삶과 정체성은 아버지와 함께 끊임없이 일치하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한편 그분께서는 보통 유다인처럼, 아시아인처럼 가족, 친구들, 여성들, 어린이들, 이방인들, 성전 관리인들, 율법교사들, 가난한 이들, 환자들, 친지가 없는 이들, 죄인들, 적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누구이셨는지 드러내는 모든 요소들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의 새 가족, 한 공동체를 모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 안에 있는 생명과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이용하셨습니다. 그분의 비유들은 단순하고도 천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에 관하여 그들에게 그분의 음식, 치료, 동정, 자비, 용서 그리고 거짓 종교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는 그분께서 친구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음식이 되셨던 만찬으로 그분을 이끌어갑니다. 십자가에서조차 그분의 이야기를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치욕스런 죽음이 그분 이야기의 결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내 아들, 그는 참으로 부활했다.”라고 아직도 하실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그분의 선물인 성령을 쏟아 부으시면서 우리에게 당신 이야기를 맡기셨습니다. 저는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라. 가서 모든 것이 시작된 곳, 나의 고향에서, 나의 사랑하는 아시아에서 다시 또 다시 내 이야기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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