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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선물' 50주년 국제회의 강연 4

등록일

2007.08.17

조회수

3,017

피데이 도눔 50주년 행사 국제대회 강연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 교도권의 선교에 비춰 본
회칙, 「신앙의 선물」(Fidei Donum)


호세 라몬 빌라 신부/ 스페인 나바라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1.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신앙의 선물」에서 교회론의 부상

1951년 회칙 「복음 선포」(Evangelii Praecones) 출판 후, 비오 12세는 1957년 4월 21일 두 번째 선교 회칙, 「신앙의 선물」을 공포하였습니다.

그분의 메시지는 긴급한 호소로 다시 울렸고, 정치적 사회 문화적 배경에서 특히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선물」이 반영한 상황은 분명히 이러한 현실에서 많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칙은 시대적 감각으로 신학적, 사목적으로 중요한 사안을 예견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라 발전하고, 공의회 이후 교도권에서 확대되었던 가르침들은 선교 이해를 위한 지속적인 실천성을 갖고 있습니다. 회칙 출판 50주년에 우리는「신앙의 선물」이 선언한 예언자적 추진을 집약하고 평가하는 단계에 와있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용어로 교황청에서는 아프리카 대륙의 선교 활동이 방인 사제의 양성과 제도적 교구의 설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경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비오 12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받은 신앙을 무상으로, 관대하게 나누어 줄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기도와 물질적 후원으로 선교를 돕도록 교구 신자들을 격려하면서, 온 교회를 고무하는 데 주교들이 자신의 고유한 직무를 다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특별한 방법으로 교황님은 주교들이 교구 사제들과 평신도들도 선교에 파견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교황청의 호소는 매우 새로운 소식이었습니다. 교회의 시각에서 강조한 몇 가지 모습들에 주목해 봅시다.

첫 번째, 비오 12세는 회칙 「신앙의 선물」에서 선교의 설립에 대한 관점을 단순히 교계제도 구조의 합법적 설립으로써 ‘교회 설립’(plantatio Ecclesiae)으로 보는 견해를 극복하였습니다. 실제로,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선교 교령(Ad Gentes)에 ‘젊은’이라고 정의한 이 새로운 교회들을 성장시키도록 이끌 신학적이고, 사목적이며, 활력적인 과정이 폭넓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교회법적 교구 설립은 그 자체로써 특별한 관심이 필요한 교회가 견고하게 설립되는 것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모든 교회에 선교의 공동 책임에 대한 비오 12세의 호소는 특별히 교황과 함께 확고하게 보편 교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도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에게 중요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이어가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선교란 모든 이들이 교황과 주교단의 교계 책임 아래 각자 자신의 방법으로 협력해야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의 활동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비오 12세는 주교단에 대하여 공의회의 가르침이 강조했던, 선교 활동과 주교단이 직접 연관된 보고서를 상기시켰습니다. 모든 것이 잘 기록되었고, 교회 교도권의 공동 자산 안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의 선물」의 새롭게 중요한 점은 “교회 전체에 교구 사제들의 봉사를 배치하기 위한 지역적 차원의 극복”에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실제로 비오 12세는 그때 진행 중에 있는 경험들을 확인하고, 주교들에게 교구 사제들을 일정 기간 동안 선교지에 파견해 줄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사제들의 적절한 배치에 대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준비하게 하였고, 이주 허가와 입적이 공의회 이후 합법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회칙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강한 자각에서 출발한 교구 사제에게 선교의 수평선을 결정적으로 열어놓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은 주교 교령, 사제 생활 교령, 선교 교령에서 선교 활동을 위한 핵심적인 모습들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공의회 이후 교도권은 개별 교회들의 친교와 선교 협력에 대한 이해의 정신으로 사제 직무의 보편적 차원을 배치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정의하였듯이, 비오 12세의 “예언자적 직감” 덕분에 수천 명의 사제들은 다른 교회들과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직무의 본질적인 보편성을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경험이 얼마나 유익하고 효과적인 것인지 충분히 확인되었다. 「신앙의 선물」 문헌에 의하여 파견된 사제들은 교회들 간의 친교의 유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으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교회 공동체들의 성장에 귀중한 기여를 하고, 다른 편에서는 여기서 신선하고 활기찬 신앙의 힘을 얻는다.”

이와 비슷하게 적절한 시기에 양성된 평신도들의 선교 파견과 관련된 시도들을 확인할 수 있고, 그에 관하여 「신앙의 선물」 18항과 선교 교령 4항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오늘날 선교 활동은 실용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교회의 본질에서 평신도의 협력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선교를 구성하는 각 주체는 하느님의 백성이고, 각 회원들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평신도들 대부분이 그 내부를 구성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선물」의 새로움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가톨릭 선교”라 불렀던 선교사 활동이 실행된 방법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회칙에서 시작된 방향은 다양한 방향을 따랐던 지난 몇 세기의 실천과 신학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일반적 양상들의 주제를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모든 교회에 대한 직무의 책임을 주교들에게 상기시킨 비오 12세의 호소는 주교들을 자신의 개별 교회에 국한시키는, 교회법 이론이라는 것이 더 나을 신학을 극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주교들은 단지 교구 안에서만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권한을 가졌을 뿐 아무도 보편적 교회의 권한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황의 배타적 권위에 속하는 ‘만민 선교’의 주도를 의미하는 것이고, 교황은 이 의무의 실행을 “이국 땅”에서 활동하는 선교 수도자들의 특별 단체들에게 위임하였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선교 활동의 일치에서 주교들을 분리시켰습니다. 사도들의 후계자라는 이유 때문에 주교들이 모든 교회들을 보살피는 데 참여해야 한다는 비오 12세의 확언은 깊이 있게 이러한 착수를 바꾸게 하였습니다.

교구 사제들의 일시적인 선교 파견에 관하여, 비오 12세는 교회 보편성에 대한 편견으로 사제들이 고유한 직무의 보편적 특성을 잊게 하며 입적한 지역에 그들을 강하게 얽어매는 관습을 변화시켰습니다.


“신앙의 선물”의 고유한 요소는 교구 사제들이 선교에 헌신하려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소속된 교구에 여전히 적을 두면서 선교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관대한 개인적 결정의 표현으로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차원에서도 교회 간 협력의 표징과 주교의 파견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비오 12세는 선교 활동의 새로운 이해를 위한 기초적 요소들을 정착시켰습니다. 결국 「신앙의 선물」 회칙의 활발한 연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 지지하고, 공의회 이후 교부들의 추진에서 깊이 연구한 교회론에서 ‘교회의 친교’를 특별히 부상시켰습니다.


2. ‘교회의 친교’로서 교회

논제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원칙적인 단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개별 교회들 안에(in quibus) 또 거기에서부터(ex quibus)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양식은 간결하나 결과는 풍성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교회는 보편 교회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과 조직적 친교를 맺고 있으며, 교황님과 함께 주교단의 감독을 받는다는 의식이 점점 증가되었습니다. ‘교회의 신비’의 역사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친교의 이러한 실현은 주교들의 감독 아래 개별 교회들 안에서 작용하고 드러나며, 그러므로 ‘신자들의 보편적 친교’는 동시에 ‘교회의 지체’인 것입니다.”

공의회의 이러한 확신은 하나이며 보편적인 실체인 교회의 본성에 완벽하게 수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실재가 어떤 기회에, 주제를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분명하게 귀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몇 가지 관련된 고찰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하나이고 유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찼을 때 당신을 드러내시고 하느님의 감추어진 구원 계획의 사회적 모습을 스스로 세우셨습니다. 이 하느님의 계획은 성부의 계획안에서 영원히 드러나며 예수님을 통해 세워지고 성령강림 때 공동체에 오신 성령의 분출로 드러나는 교회-신비이고, 교회-신비의 첫째이며 구체적으로 보이는 실체입니다. 거기에는 제자들, 성모 마리아, 열두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메시아의 백성은 모든 이들을 포함하지 않은 작은 무리였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온 인류를 위한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튼튼한 싹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조직은 오늘 보편 교회를 형성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그래서 머리로서 베드로와 사도들의 후계자들과 함께 하느님 백성의 내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하튼, 교회-신비는 성령강림 날에 되풀이될 수 없는 유일한 형태로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한 장소에 위치한 교회였고, “구체적 개별 교회”도 아니었으며, 현대적 용어의 의미에서 하느님 백성의 “부분”도(다른 교회들, 다른 ‘부분’들을 내포하는) 아니었고, “모든 언어를 말하는 교회”, “보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보편 교회”는 현대적 용어의 의미가 아니어서, ‘교회의 친교’란 성령강림 날, 거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에, 그로부터 구분되는 다른 교회들을 말합니다. 성령강림의 공동체는 신앙고백의 네 가지 특성을 지닌, 단지 그리스도의 교회였습니다. 교회-신비의 최초의 이 순간은 되풀이될 수 없는 방법으로 보편성을 눈에 보이게 실현합니다. 성령강림의 교회에서 보편성과 개별성은 하나의 방식으로 여겨졌고, 다른 방법으로는 보편성은 역사 안에서 지속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결국, 교회의 시기에서 성령강림의 보편적 교회는 교회의 친교로서 개별 교회들 “안에서”, 개별 교회들“로부터” 그 보편성을 실현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선교 확산과 함께, 보편적 교회는 한 어머니의 자녀들처럼 그로부터 나온 개별 교회의 모습에서 그 보편성을 표명합니다. 교회들의 친교 안에서 존재하는 이 교회들은 분명히 성령강림의 교회와 거리가 먼 다른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순간부터 개별 교회의 구체적 역사 안에 교회는 직무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사도단이 아니라 사도들의 후계자들 또는 한 사도를 가진다는 사실이 개입됩니다.” 이 순간부터 어떤 교회도, 예루살렘의 교회조차도, 그 자체를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들의 친교, 또는 보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보편 교회와 개별 교회의 역동성은 곧 교회들의 보편적 ‘친교’로서 교회가 개별 교회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에게서 교회의 보편성이 실현되는 순간에만 가능합니다. 한편으로, 교회-신비는 마리아, 사도들, 베드로와 함께 모인 보편적 교회에서 실제로 드러남을 증명하는, 모든 개별 교회에게 “존재론적이고 현세적인 예견(previa)”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다른 한편으로 성령강림의 ‘보편적 교회’는 ‘교회의 친교’의 그 실제 모습에서 개별 교회들뿐만 아니라 보편 교회에서도 ‘어머니’가 되었고, 이렇게 역사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역사 안에서 보편 교회와 개별 교회들은 구별된 존재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적 상호 관계에서 살고, 모든 개별 교회들 안에 보편 교회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편 교회의 고유성을, 매순간 보편 교회를 구성하는 구체적 개별 교회들의 각 교회와 관련된, 친교에서 확고한 방법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오직 보편적 친교인, 하나이며 유일한 교회만이 주님에게서 약속들, 새 계약의 자산, 신앙의 완전무결하고 확실한 선물들, 그리고 신앙의 성사들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보편적 친교만이 열두 사도와 베드로의 사도적 조직을 받았습니다. 각 개별 교회는 보편 교회와 함께 친교를 살아감으로써 교회의 신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제를 위한 결정적인 논제를 양식화할 수 있습니다. 보편 교회가 각 교회 안에서 참으로 존재하고, 내재하며, 활동한다면 그 자체로써(eo ipso) 보편 교회와 함께 그들의 내적 본성이 개별 교회들 존재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교회 현실의 다양한 차원을 이해함으로써 이뤄낸 결과들입니다.

보편 교회와 개별 교회들의 내적 상호 관계는 그리스도인 조건의 차원에서 모든 세례 받은 이들이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두 차원의 교회에 (신앙과 세례성사의) 유일하고 동일한 행동으로 동시에 함께한다는 사실에 반영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적이고 성사적인 같은 이유로 개별 교회 안에 있는 보편 교회에 속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개별 교회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보편 교회에 속하는 것이고, 합법적으로 종속되어 남아 있으며, 그들은 이 본질적인 성사적 소속을 감추거나 또는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각자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그분의 교회 안에 있으며, 교구의 교회법적 견해에서 본당이나 또는 다른 개별 공동체에 소속되거나 아니거나 입니다.”

각 개별 교회에서 보편 교회의 내면화는 ‘교회 친교’의 (주교와 사제의) 직무 구조에서도 반영됩니다.

첫 번째는 주교직에 반영됩니다. 주교단과 그 단장인 교황은 보편 교회의 선교 책임이 있습니다. 회칙, 「신앙의 선물」은 이러한 진리의 결과를 명확히 하며, 각 주교들이 개별적으로, 합법적인 주교단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다른 주교들과 함께 내적으로 확고하게(in solidum) 교회의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교단의 책임은 선교 활동에서 각 주교의 개별 책임을 분명하게 기록하였으며, 다른 수도회들에 대리시키거나 익명의 집단주의에서 희석시킬 수 없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직 계승은 개인적으로 사도들에게서 주교들까지 그리고 주교들에게서 주교들에게 온 것이 아니라, 집단적 사도단에게서 주교단으로 온 것입니다. 각 주교는 후계자들의 단체에 집단적이고 성사적인 합체로써 개별적으로 사도 후계자에 들어갑니다. 주교 서품은 우선적으로 서품되는 주교를 주교단의 단원으로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 직위로서 각 주교는 성사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보편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이는 주교들이 지정된 한 교구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교단의 구성원으로서 주교는 마치 모든 개별 선교 법을 “앞서는”, 그리고 주교 임무의 특성과 조직적 책임으로서 ‘모든 교회에 관심을 가지는 데’에 직접 참여해야 합니다. 각 주교는 결과적으로 온 세상에서 선교 활동의 책임을 맡고, 보편적 복음화를 실현하는 존재입니다.

사제들의 직무 또한 보편 교회를 위한 주교의 고무적인 직무에 동참합니다. 이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염려하는 회칙, 「신앙의 선물」의 기본적 전제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3. 사제직의 보편적 차원

비오 12세의 회칙 실행 다음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보편 교회의 사제들의 임무에 대한 신학적 기초 주제를 확인하였습니다.

사제들에 대한 공의회의 가르침은 주교들과 사제들 사이에 선교와 축성의 일치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모든 사제는 주교와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동일한 사제직과 그 직무에 참여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인 주교들의 직무를 통해 당신의 축성과 선교에 참여시키셨습니다. 사제들은 주교들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직접 받은 선물로서 이와 같은 축성과 선교에 참석합니다. 그러므로 주교품과 함께 교계적 친교 안에서 그리고 종속 관계에서 성사적 요구로써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제는 주교단의 직무 안에 있습니다. 사제들은 서품으로 “주교품의 협력자들로서 사제품”에 소속되었습니다. 성품성사의 첫 번째 효과는 보편적 사제품(Ordo Presbyterorum)에 사제를 일치시키는 것이고, 그로부터 주교들과 함께, 사제들과 함께 구성된 유대 관계에 있습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주교단과 함께 결합된 성품성사에서 성사적으로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서품으로 모든 사제들은 그 자체의 보편성과 성사적 친교 안에서 그들과 일치하고, 주교 품계와 일치합니다. 이러한 조직적 일치의 활동 결과는 단체의 보편 선교와 함께 성품성사의 직무적 공동 협력입니다. “사제로 있다는 것은 교회 선교의 보편적 차원에서 주교 단체와 함께 구조적 유대를 위하여 자신의 열린 자세를 의미합니다.”

결국, 주교들과 사제들을 일치시키는 성사적 유대 친교 덕분에, 주교의 고유한 ‘모든 교회의 관심’의 의무가 사제들에게도 맡겨지는 것입니다. “교구 사제이든 수도 사제이든 모든 사제는 주교단과 결합되어 있으며, 자신의 성소와 은총에 따라 온 교회의 선익에 봉사하는 것이다.” 사제들이 서품에서 받은 영적 은혜는 한정되고 제한된 어떠한 사명이 아니라, 사도들에게서 주교들에게 위임된 그리스도의 선교에, 그리고 사제의 같은 보편적 풍요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제 서품으로 신부는 모든 교회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제 서품은 직무의 다양성과 선교의 일치로써 주교들이 주관하는 사제들의 구조적 양식에서 주교단과 함께 공동 협력하는 것입니다. 보편 교회의 사제직은 실질적으로 개별 교회의 사제들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순간마다 보편 교회를 구성하는 교회들로부터 구분되는 고유한 보편 교회의 이념을 초월합니다. 반면에, 주교품과 함께 사제품을 일치시키는 성사적 유대는 모든 사제들이 그들 간에 그리고 모든 주교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같은 유대이며, 동시에 개별 사제 안에서 사제 단체가 그들 간에 그리고 그것을 주관하는 주교단과 함께 일치되는 같은 유대입니다. 성품성사로써 사제들이 되고, 그와 동시에 개별 교회와 사제들의 중심에서 보편적 주교단의 협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위로써 발생합니다.

결국 위에서 언급한 성사적 동시성은 연결된 두 순간에, 주교 서품과 개별 주교와 함께 사제들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한 지역의 사제가 되기 전에 성품성사에 합체되는 것이 아니며, 주교의 중재로써 다음 순간에만 그들은 다른 주교들과 함께 친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반대로, 서품으로써 사제들은 두 번째 순간에 개별 사제로, 그 보편성이 있는 성품성사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순서는 연대적이 아니라 신학적 성품성사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행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성품성사가 첫 번째 효과로서 지역 사제에 합체되는 것이라면,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나아가는 자신은 “재 수품”(riordinazione)의 효과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은 마치 한 개별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가 다른 교회로 이전하는 과정을 자신의 “두 번째 세례”로 인정하려는 사건처럼 생각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결론적으로, 사제들 간에 그리고 모든 주교들과 함께 일치되는 성사적 유대는 보편적 그리고 개별적 두 차원에서 하나이며, 사제들 간의 일치와 주교와 함께하는 개별 사제들의 일치는, 개별 사제들 안에 존재론적으로 실현되는 신품성사의 일치처럼 성사적인 것입니다.

그 결과, 우선 성품성사에 합치됨은 그 자체 보편성을 통해서 모든 개별 사제들에 성사적 합치됨을 이루고 있습니다(세례 받은 이가 신자로서 모든 개별 교회들에 합치되는 것처럼 유사한). 이러한 이유로, 다른 교회의 사제로 이전하기 위한 새로운 서품은 의미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많든 적든 한 사제의 합법적-사목적 정관의 변경을 유발할 것입니다(입적, 법적 선교). 이러한 소속과 사목적 임무의 규범은 합법적 유대를 결정하며,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랍니다.
그러나 사제에 관한 다양한 법적 정관은 신학적 정관에서 구별되고, 교회의 친교 안에서 모든 주교들과 모든 사제들과 함께, 그리고 모든 개별 교회 사제들의 중심인 주교와 함께 사제들 간에 근본적인 성사적 일치를 승인합니다.

사제는 모든 교회의 친교 안에서 개방된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보편적 교회의 친교 안에 자신의 참여를, 곧 개별 교회 안에 사제로서 소속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교회에서 행하는 사제들의 봉사가 소속 교회와 다르고, 신학적으로 소속 교구에 대한 자신의 직무에서 제외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속된 개별 교회에도 직접적인 봉사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교구는 보편성을 띠고 있습니다. 어떤 사제직이든, 사제는 자신의 출생 지역에서 존재하며, 개별 교회의 주교와 함께 그리고 그 동료 사제들과 함께 밀접한 성사적 형제애에서 발견됩니다. 훈령, 「사도시대 이후」(Postquam apostoli)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과 함께 계속하면서, “자신의 교구에서 했었던 것처럼” 필요로 하는 개별 교회들의 그 직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모든 사제들은 “보편 교회의 필요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확인하였고, 참으로 선교사적 교회론에서 항구적으로 활성화시켜야 하는 사제들의 본질적 모습을 재요청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 친교의 중심에서 선교 전망의 직무에 대한 이러한 고찰들을 전개해보겠습니다.


4. 교회 친교로서의 선교

선교 교령은 “선교”의 이해를 위한 새로운 모형을 제공하였으며, 같은 선상에서 루이 부이에는 놀랍게도, 지역 교회는 무엇보다 분리해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재생산되고 이식되는 것과 같다”라고 확인하였습니다.

교회의 확산은 복음화와 새로운 교회의 탄생으로 실현됩니다. 복음의 첫 번째 선포, 그리고 세례성사는 다른 교회에서 파견된 봉사자들(사제들,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이 방인 주교가 없어도, 기초적 구조의 봉사이지만,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성체성사적 공동체를 설립합니다. 주변에 낯선 공간을 생성하지 않는 이러한 선교 활동은 신학적으로 교구에서 교회법적인 설립과 함께 교회의 규범이 될 것입니다. 엄밀하게 선교는 그 시작이 미약할지 모르나 “선교들”이 아니라 “교회들”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모형은 신학적 정관에서 하나같이 “선교”에서 “성장하는 교회”로 라는 문장으로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립된” 교회와, 교황의 배타적 권한 아래 있지만 주교들과 개별 교회들은 책임에서 면제되어 있는 중심 밖의 지역을 의미하는 듯한 “선교 지역” 교회라는 이원론을 극복하게 됩니다. 반면에 교회의 연대 의무로서 선교의 개념은 이들의 협력 안에서, 베드로 후계자의 최상의 지도 아래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교회의 친교를 이끄는 로마 교회의 주교인 교황의 보편적 책임은 개별 교회들과 그들 주교들 간의 형제애를 활성화하고, 주교회의의 임무를 격려하는 것이며, 필요에 따라 그의 지침 아래 적절한 기구들을 통해 그 기구들을 지원하고, 젊은 또는 오래된, 개별 교회들로부터 선교사들 파견과 지역 교회 시작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이러한 양식으로 베드로 후계자가 이끄는 교회의 친교 안에서, 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보편주의를 이해시키게 됩니다.
선교를 완성하는 이 방법은 “온 세계를 위한 모든 교회”라는 이 심포지엄의 표어에 탁월하게 요약되었습니다.

회칙, 「신앙의 선물」은 사제들을 선교에 파견해야 하는 주교들의 책임에 호소했습니다. 회칙에서는 다른 개별 교회들에서 사제들의 일시적 봉사보다는 성직자 배치에 더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 교도권의 가르침은 선교 파견은 계속되는 선교 방법의 문제에 대한 응답 또는 주교들의 책임에 대한 단순한 촉구만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선교 파견은, 분명 조직적 형태여야 하고, 이는 더 깊게는 ‘교회 친교’에서 파견되고 돌아오는 모든 방향에서 협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교회를 격려한다.’(sollicitudo omnium ecclesiarum)라는 표현은 주교단과 그 수장뿐만 아니라 모든 개별 교회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의회 이후 교도권은 교회들 간의 협력은 교회들의 보편적 지체이기도 한 신비체의 보편성과 모든 하느님 백성의 책임이 이뤄낸 결실이라는 의식을 발전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선교 본성에 대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교회는 본성상 선교이며, 개별 교회들 안에서 보편 교회가 생활하고 작용하는 것입니다. “개별 교회가 고립되지 않고 전체 교회와의 친교를 유지하고 선교적 교회가 되면 교회의 신비가 각 지역 교회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이 더욱 분명해졌다.” ‘교회의 친교’의 선교 전망은 교회의 보편성에 이질적인 지역주의 안에 숨어버리는 개별 교회들을 방해합니다. 어떤 교회도 자체의 자기만족으로 고립될 수 없고, 오히려 “보편 교회의 활력 있는 부분으로서 다른 교회들의 필요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개별 교회에 모든 가치를 둔 교회론은,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교회의 보편적 소명을 강화시켰습니다. 각 교회는 다른 교회들 전체의 한 부분을 이루며, “모든 교회를 위한 배려는” 각 개별 교회의 고유성입니다. 모든 교회의 선교 의무는 근원적이며 필연적인 것이며, 진정한 주체들은 “교회의 같은 존재들 안에서(...)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보편적이고 유일한 교회를 생활하는 것입니다.” 협력은 단순히 부차적 의무가 아니라, “보편 교회에 공통인 모든 활동을 장려하는” 데 개별 교회를 이끄는 내적 활력의 표현입니다. 개별 교회는 보편 교회의 모상으로 형성되었고, 최고의 가능성을 완벽하게 표현해야 하며, 자신 안에 모든 교회의 희망과 고뇌, 기쁨과 슬픔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보편 교회와 함께 개별 교회들의 친교는 선교를 실천함으로써 완성에 도달합니다. 협력은 교회의 생명력과 서로 간의 애덕의 척도를 나타내고, 더욱이 그리스도의 지체 안에서 놀라운 부요를 완성합니다.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신자가 성령 안에서 다른 이들과 친교를 이룬다. 이렇게 하여 ‘로마에 앉아서 인도인들이 자기 지체임을 안다.’” 이 보편성의 힘으로 교회들은 “각 부분이 그 고유한 은혜를 다른 부분들과 온 교회에 가져다주어, 전체와 각 부분은 모든 것을 서로 나누며 일치 안에서 충만을 함께 도모하는 가운데에 자라나게 된다.” 협력은 “그러기에 마침내 교회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는 영적 부요와 사도직 인력과 현세적 자원에 관한 긴밀한 친교의 유대가 존재한다. (……) ‘각자가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봉사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총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4.10)” 부유한 교회와 가난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는 다른 이들의 선물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모든 이는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부유해집니다. “도움을 받는 교회의 가난이 도움이 부족한 교회를 부유하게 합니다.”라고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확인하십니다. 오래된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이든 젊은 교회들이든 모두 그들의 가난 속에서도 나누면서, 선교를 통해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일궈내야 합니다.

교회들에 존재하는 내적 상호성은 그들 간의 고유한 선물들을 교환하는 데서 이행됩니다. 이 선물들 가운데서 사제들,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의 파견과 수용이 발견됩니다. 여러 세기 동안 그리고 오늘날까지 수도회들은 세계 복음화를 위해 훌륭히 봉사해왔고 열정과 경험으로 책임을 다하였습니다. 선교를 향한 그들의 아낌없는 헌신에 대하여 어떤 감사의 말로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모든 개별 교회가 선교 활동의 주체라는 재발견은 기쁘게도 “보편 선교를 위한 교구 사제들”로서 ‘피데이도눔’ 신부들의 선교를 위한 출발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개별 교회들 간에 그들의 파견은 감동이며 효과적인 친교의 살아 있는 표징입니다.

사제는 선교에 주력하면서 더욱더 자신의 개별 교회에 직접적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교, 사제,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는 모두 선교에 나갈 수 없기에 각 교회에서 어떤 이들은 선교를 수행하고, 다른 이들은 이러한 파견으로 전달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보편적 책임을 이행하는 공동체의 조직적 임무의 결과라는 의식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들에 남녀들을 선교사로 파견하지 않는 개별 교회는 자신의 교회 안에서 빈약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피데이도눔’ 사제는 ‘온’ 교회, ‘모든’ 교회들, 모든 교회 안에서 ‘모든 이들’인 사제들과 신자들이 “선교의 신분”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처럼 주님에게서 받은 선물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축성되고 파견되는 것입니다.

이 성찰의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최근 베네딕토 16세가 교황 권고 「사랑의 성체성사」(Sacramentum Caritatis)에서 한 말씀보다 더 적합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전체 교회의 이름으로 교황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확인하셨습니다. “자비로운 헌신과 능력으로써 공동체를 건설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생명의 빵을 나누고, 교회의 선교 봉사에 아낌없이 노력한 ‘피데이도눔’ 사제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그리스도께 봉사하기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면서까지 고통을 겪은 수많은 사제들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들 안에서 사제로 존재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심오하게 웅변적으로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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