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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선물' 50주년 국제회의 강연 1

등록일

2007.06.28

조회수

3,167

‘신앙의 선물’(Fidei Donum) 50주년 행사
국제회의 강연 1.

교회의 친교 모범에서 밖을 향한 ‘만민 선교’의 필요성과 긴박감

신앙의 선물 - 선교의 모든 필요를 위한 사제


가우덴시오 B. 로잘레스 추기경/ 필리핀 마닐라대교구장


1. 삼위일체 - 선교의 원천, 심장

성부에게서 발하신 성자와 성령의 선교는 성자를 통하여 수행되고 세 위격의-사랑하시는 성부와 사랑이신 성령 안에서 사랑받으시는 성자- 영원한 일치에 원천을 두고 있다. 선과 사랑의 원천이신 천주 성삼 안에서 이러한 친교가 시작된다. 공존하시는 각 위격은 하느님 삼위일체 안에 선함과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 아버지(‘시작이 없는 시작’)의 사랑에서 나오고, 당신 사랑으로 자유로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선교의 신비는 사랑의 친교를 통하여, 파견하는 이가 어떤 의미에서는 파견된 이도 되고, 주는 이가 깊은 영혼 안에 일치되어 선사받는 이가 됩니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안에서 신적 위격들은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사랑합니다.

물질세계에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시작되고 그 절정의 순간에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인간은 무한한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땅 위에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과의 친교에 들어오신 창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하심을 인간에게 확인시켜 주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기 위하여, 인간이 신성에 참여하도록 하느님과 인간의 참된 중개자로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내지셨을 때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강생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성부의 사랑은 믿는 이들 가운데, 또는 교회의 구성원들에게만 선포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선포되었고 사도들을 통해 초대 교회에서 살고 나중에는 사제들을 통하여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한 번 선포하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하신 일은 .... 땅 끝까지 선포되고 전파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교회 자신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반복하기 위하여 선교에 파견되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세상 끝까지 그분의 증인이 되도록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2. 본성상 선교인 교회

교회는 본성상 선교이며, 또한 “하느님과 이루는 친밀한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성사, 표징이며 도구”입니다. 그보다 더 깊은 신비는, 교회는 하나이며 동시에 친교로서 구성되었고, 나눔의 능력을 받았으며, 또한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으로 다양한 이들을 만나도록 파견되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변화시키고,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교는 한 분 하느님이신 삼위의 깊은 관계입니다. 이러한 친밀하고 사랑 깊은 친교와 나눔으로 삼위 안에서 영원으로부터 하나이신 하느님은 창조된 인간을 만나러 가실 수 있습니다.

친교의 영성은 인간에게 교회에 존재하는 일치의 원리에 대하여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며, 이웃 안에서 긍정적 모습을 찾아내게 합니다.(항상 부정적 모습은 아닙니다.) 친교의 영성을 통해, 교회는 형제자매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그 고유한 장점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려는 영감을 받습니다.

친교와 선교는 교회가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려고 준비한 소중한 두 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제자들을 통해서만 성부의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당신의 선교를 계속하실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하신 말씀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한 “고유한 선교”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제들과 선교사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이름으로 복음화할 수 있으므로 그들은 먼저 주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로부터 선교에 파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 제자로 선택하신 이들의 조건에서처럼 복음 전달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깊고 친밀한 관계로 양성되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세 번의 중요한 순간들

세 번의 중요한 순간들은 자신들의 삶을 스승의 뜻에 맡긴 사도들에게 맡겨진 임무에서 유래합니다. 이 세 번의 순간들은(마치 프리즘에 비친 빛의 색처럼) 다른 것에서 하나가 구분되지 않고, 새로운 색을 도출하는 데 서로 결합되고, 녹아들고,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소명은, 많은 경우 선교가 제자들의 환경에 통합되었던 것처럼 선교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 세 단계들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사도들의 부르심과, 사도들 양성의 상징적 모습을 강조한 서술에 나타납니다.

첫 번째 순간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실”(마르 3,13) 때입니다. 이 단계는 사제성소와 관련됩니다. 그리고 분명히 편애에 근거한 부르심, 특별한 부르심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성소는 사랑을 조건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이만 부르십니다. 어디에 사시냐는 질문에 스승께서는 “와서 보아라.” 하십니다. 그리고 첫 번째 제자들은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이 부르심은 단지 친구로 초대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한 동반자에게 하는 각별한 표현이었고, 당신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열둘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마르 3,14)라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제자로 정착하는 것이고, 군중들을 보살피고, 봉사하고, 활동하시는 그분의 방법과 그분의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듣고, 관찰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순간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주님의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의 행동을 통하여 인간적 친분은 스승과 사도들의 신뢰와 친밀함으로 바뀝니다. 사도는 본질적으로 주님의 충실한 벗이며, 군중의 스승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친밀한 관계는 그리스도인 삶에서뿐만 아니라, 사도 영성에서도 중심을 이룹니다.

세 번째 순간은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마르 3,15) 하심으로 분석됩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하심은 특별히 선교로 부르셨다는 행동을 정의합니다. 이 순간 사도들은 복음화에 초대된 이들의 문화와 민족들 가운데서 주님의 연민과 사랑과, 지혜를 이야기하고, 설교하라고 보내졌습니다. 그러므로 복음화는 부르심의 특권을 지니고 오직 주님만이 시작하실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서 제자로서 온전히 실현하도록 선택된 제자들의 삶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4. 세상의 복음화, 민족과 문화

주님에게서 파견된 사도들을 경청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복음화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가르침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하시며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민족들”에 모든 백성과 문화가 표현되었음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하느님 나라가 근원적이고 심오한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실현되어야 하며, 개인의 삶과 민족들의 문화 모두에 참된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입니다. 문화는 시간이 갈수록 변화되며 그 변화가 검증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에는,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지만 더 많이 소유하고 품행을 개선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행동 양식을 변화시키고 개선하려는 역동적 활동이 있습니다. 문화는 여러 차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가지만 거기에는 또한 점진적으로 관습을 부정부패로 변화시키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인간은 그들의 사회와 문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환경에서 포악한 행동으로 폭행당하고 억압당하며 개인은 물론 그들 문화와 사회의 내부까지 간여하는 무수한 부정적 상황에서 자유를 지키기 투쟁하면서 군중은 세상의 대부분의 변화에 반응을 보입니다. 오늘날 지구에는 자신이 소속된 신앙이나 문화가 어떠하든 안녕을 추구하는 평화스런 인간 공동체를 위한 어떤 피난처도 존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5분의 1의 세상에는 세계적이든 지역적 차원에서든 무자비한 시장 또는 폭력, 광적인 인종학살의 공포와 무분별로 개인이 희생될지 모른다는 고통과 공포가 깔려 있습니다. 모든 세상에 알려진,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증가하고 있지만- 무식, 가난, 질병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제국주의, 신식민주의, 새로운 정복, 정치적 경제적 경쟁, 세계화의 오늘날 현상을 내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투쟁하면서 선과 사랑의 왕국에 대한 기쁜 소식으로 보장받을 필요를 느낍니다. 어떤 조직이나 제도이든 거기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는 아버지 나라의 현존의 필요를 알리고, 어떤 지역에서는 아버지 나라를 다시 소개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여기, 아버지 나라를 모두에게 선포하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 ……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59-60)

기쁜 소식을 전하러 파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버지 사랑의 나라는 그분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늘나라만이 주님에게 절대적 가치이며, “다른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었습니다.
5. 복음화의 선교, 교회의 본성

그러므로 밖을 향한 선교는 모든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가난과, 무지로 인한 긴급하고 막중한 요청의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 사랑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거나 또는 민족들을 복음화한다는 것은 교회의 고유한 정체성, 소명, 은총, 본질적인 선교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화하기 위해서, 가르치기 위해서, 은총의 선물을 전하는 통로가 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온전히 혼자일 수 없고, 적어도 다른 이들을 만나러 가는(또는 선교에 파견되는)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복음화의 선교는 긴급성이나 극단적 필요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포함된 당신의 사랑이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듣고, 받아들이려는 갈증과 요청은 수천 년에 걸쳐 비록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표현되지만 늘 모든 문화와 문명 가까이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했습니다. 늘 기쁜 소식을 들으려는 갈망이 존재했고, 인류 역사에서 이러한 갈망이 없거나 기다리지 않았던 시대는 전혀 없었습니다. 선과 사랑, 소식에 대한 열렬한 소망은 늘 인간 의 마음 안에 존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로서 복음화의 선교는 일시적인 긴급성이나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과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함께 또는 다른 이들을 통해서, 또는 하느님 사랑의 기쁜 소식의 씨를 뿌리러 파견된 그룹을 보내면서, 다른 양식을 따르고 어느 곳이든 다른 이들을 만나러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성소이고, 예수님의 선교 방법과 일치하는, 가톨릭교회의 본성이며 성소입니다.


6. 인구 이동의 폭넓고 급속한 현상, 선교의 새로운 도전

교회와 선교의 새로운 도전은 현대 세계의 문화 전형인 폭넓고 급속한 인구 이동의 현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이민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선교의 의미나 비중 면에서 도전입니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이유의 이주는 이주민들 고향의 교회에서든, 그들이 현재 거주하는 곳의 교회에서든 선교의 중요성에 대한 바람직하고 관대한 이해가 요구됩니다.

과거에 선교사들은 그들의 문화와 전혀 다른 먼 곳으로 파견되었던 반면에, 현재는 각자의 고국에서 단지 몇 시간 정도 떨어진 곳일 뿐이므로 문화는 쉽게 공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여행 수단은 선교사들의 여행을 더욱더 간결하게 해주었고, 떠나는 선교사에게 잠시 후에 만날 것처럼 ‘또 만나’라는 간결한 인사는 그가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고국을 방문하여 새로운 환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파견되어 하느님 나라를 전하려면 선교 지역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배워야 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살기 위해서 온 이주민들이 인구의 10%가 되는 국가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주민들을 선교사로 생각할 수 있습니까?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자국의 이주민들을 사목하기 위해 파견된 사제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안정된 교회, 곧 몇 세기 전 자신들의 국가를 그리스도교화한 첫 번째 선교사들이었던 교회를 인도하러 온 사제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도 선교 대상입니까?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갑자기 선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전하는 새롭고 넓은 시각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개별 교회의 요청은 참으로 교회 전체의 요청이기 때문에, 교회는 현 세계의 선교적 요구들을 이해하고 최대한 관대해져야 합니다. 오랜 전통의 교회와 최근 설립된 교회, 파견하는 교회와 받는 교회의 거리감을 없애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자신의 본성이며 정체성인 선교는 두 방향 (주고받으며, 파견하고 수용하는)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7. 교회를 돌보는 나눔으로서 친교

그러나 오래 전부터 교회는 벌써 이러한 선교적 도전과 긴박성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은 더 많은 것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모든 주교는 사도단을 계승하는 주교단의 구성원으로서 한 교구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축성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마르 16,15 참조.) 베드로와 함께 베드로 아래에서 맨 먼저 또 직접 주교들에게 미친다. 여기에서 오늘날 복음화 활동의 추진에 절실히 필요한 교회들의 친교와 협력이 일어난다. 이 친교의 힘으로 각 교회는 다른 모든 교회에 관심을 가지며 자기의 필요를 서로 알리고 자기 것을 서로 나눈다.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이 주교단 전체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결론으로, 교회의 큰 두개의 선물인 친교와 선교에 대하여 성찰한 후, 우리는 교회에 속한다는 것이 자신의 교회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하지 않은 모든 교회들도 배려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결코 긴급함이나 필요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화의 임무에 전념하던 것을 중단하거나 하느님 백성들의 필요를 돕기 위해 자신의 자산을 나누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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